“칼, 그 대척점에 있는 악기, 칼과 악기의 중간에 있는 연장, 이들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축이다. 악기의 힘에 대해 우륵은 “소리는 울리는 동안에만 존재하는 덧없는 것이지만 칼과 달리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세상을 연다”
김훈의 ‘현의 노래’ 중에서
최근에 제가 좋아하는 작가 김훈의 글을 읽었습니다. 한 음악가의 반역과 그 삶의 여정을 어슷한 시선으로 물끄러미 쳐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셈입니다. 우륵의 생은 곧 현이였으며 현의 소리를 지키기 위한 그의 모든 행적들은 오롯하게 새겨질 역사학자의 판단의 그물 속으로 던져지게 됩니다.
담양의 숲에 가본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겨울의 시간에 여전히 시간의 사금파리 속에 토해지는 연두와 짙은 초록의 색감이 휘몰아 감도는 숲의 공간. 숲 위에 내리는 눈이 숲의 연두빛을 지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배우고 올수 있었더랬습니다.
12줄 가야금은 가야 전래의 현악기를 중국 악기를 참고해 개조한 것입니다. 가야의 멸망으로 우륵이 신라에 망명하고 진흥왕이 전폭 후원하면서 기쁘나 경솔하게 흐르지 아니하고 슬프나 지나친 상처의 탐닉에 빠지지 않는 소리의 미학을 구축하게 됩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6줄 거문고가 문인들의 풍류문화를 주도하는 악기였기에 가야금은 그 존재론적인 우위론이나 음의 빛깔을 청음의 캔버스 위에 그려내지 못한 채 도태되어 갔던 것입니다. 이후 민속 예술음악에 바탕을 둔 순수 기악 독주 형식의 산조(散調)가 탄생하면서 19세기말 이후 가장 대표적인 악기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시인 조지훈은 ‘가야금’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휘영청 달 밝은 제 창 열고 홀로 앉다.
품에 가득 국화 향기 외로움이 병이어라.
푸른 담배 연기 하늘에 바람 차고
붉은 술그림자 두 뺨에 더워온다.
천지가 괴괴한데 찾아올 이 하나 없다.
가야금을 연주하는 시간의 숲은 적요하고 탐미스럽기까지 합니다. 끊임없이 내적인 침잠과 외부로의 외침을 토해내는 현의 울림은 그 옛적 우륵의 정치적 모반속에 잉태된 상처의 숲을 우리 속으로 이끌어 들이지요.
가야금산조는 북의 장단에 맞춰 홀로 연주되는 대중 민속 음악 양식으로, 즉흥연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 "흩어지는 가락"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 가락은 시나위에서 발전된 것으로 전라도의 남서부 지역에서 전통적인 샤머니즘 의식을 치를 때 연주되는 즉흥곡의 한 형태이지요.
가야금으로 산조가락을 옮긴 남도무악의 하나로 특별한 규칙이 없이 소곡을 연이은 것으로 격정이나 정경등을, 마치 희로애락을 말하듯 왼손 농현의 기교로써 나타냅니다. 기본 형식에는 진양조(6박자 4절), 중모리(3박자 4절), 자진모리(4박자 1절)의 3악장이 있다. 그밖에 중중모리.엇중모리.휘모리.단모리 등도 있습니다.
'모리'라는 것은 '머리' 또는 '몰이' 라고도 하는데 '몰아간다'라는 말에서 온 말입니다. 이 장단들 은 판소리의 극적 상황에 따라 가려서 사용되는데 여유있는 대목에서는 느린 진양, 긴박한 상황에서는 자진모리나 휘모리등의 빠른장단이 사용되지요. 다시 표현하면 ‘모리’란 우리내 젖은 감성들을 상처의 씨줄과 환희의 날줄로 엮어내어 한차례 마음의 잔치를 향해 몰아가려는 우리 내 백성의 태고적 내향성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산조는 한 인물에 의해 창작된 개인적인 양식이 아니라 우리민족 기층음악의 역량이 응집된 시대성을 지닌 양식이기 때문에 음악양식이 확립되자 빠른 속도로 기층민중들 속으로 퍼져나갔고, 사랑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산조의 시조를 누구라고 단정해서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2009년 가야금앙상블 더휴 공연
우리 속에서 토해내는 상처의 침전물들을 개인이 아닌 집단적 차원에서 해소하고 풀어가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가야금은 결코 고고하게 학처럼 비상하기만을 꿈꾸는 악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늘같은 날은 가야금의 현의 울림에 몸을 맡기고 싶습니다. 쉼과 숲의 섞여들어감이 이질적이지 않은 현명함의 소리를 갖고 살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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