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필로소피아

옷을 만드는 일은 생의 뿌리를 향하는 것

패션 큐레이터 2018. 2. 22. 20:17




부암동에 다녀왔다. 패션 디자이너 박소현의 포스트 디셈버에 들렀다. 매장의 배치가 단아하게 변했다. 단단한 테일러링에 기반한 비스포크 수트를 잘 만드는 디자이너의 작업도 살펴봤다. 오랜동안 디자이너 박소현의 행보를 지지해왔다. 고집스러움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스스로 옷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이라 그렇다. 



최근들어 나는 독특한 패션 프로젝트를 해 볼 생각에 여러가지 일을 벌였다. 복식에 대한 연구는 최근 들어 패션 스터디란 이름 하에 다양한 관점들과 패션을 접목시키고 있다. 학제적 연구들은 이론적 매력이 있다. 하지만 옷이라는 엄연히 물질문화의 총화를 말로만 풀어내기엔 난 항상 답답했다. 요즘은 패션과 영화라는 장르를 어떻게 만나게 할까를 고민중이었다. 



최근 근사한 시나리오를 하나 발견했고, 감독님과 함께 옷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다. 부암동에 들렀던 것도 그런 이유다. 이곳에는 내가 좋아하는 디자이너들이 많다. 따스한 봄날, 핸드메이드의 동네를 돌아다녀야지 한다. 오늘 함께 간 영화감독님도 디자이너와 빛깔과 결이 잘 맞는 것 같다. 이런 이들과 함께 공동작업을 할 수 있는 건 기쁨이다. 살아가면서 사람을 만나는 일은 이중의 렌즈로 세상을 보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만남의 종류, 만나는 사람의 개성과 결에 따라, 만남의 시간은 힘겹기도, 혹은 기쁨이 되기도 한다. 좋은 만남만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고 뒤끝이 쓰거나, 아팠다고 해서 만남의 의미를 폄하할 수도 없다. 수없이 많은 만남의 결이 '하나'의 결로 뭉쳐 응축될 때, 한 인간의 성장을 지탱하는 디딤돌이 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국, 관계의 형성 속에서 존재의 뿌리를 내린다. 디자이너에게 뿌리란 결국 한 벌의 옷을 완성하려는 의지다. 이것이야 말로 그/그녀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동력이다. 디자이너는 이 뿌리에 도달하기 위해, 옷을 만드는 직물을 살피며, 심지어는 한올 한올을 모아 제직한다. 이것은 고생물학자가 시간의 지층을 파고 들어서며 세계의 뿌리에 도달하려는 의지와 다르지 않다. 패션은 한 송이 꽃처럼 계절의 리듬을 견뎌내는 산업이다. 옷도 꽃처럼 한 계절을 누리며 피었다 진다.  



반복되는 계절은 시간의 지문을 남긴다. 더깨더깨 누적된 시간의 겹을 뚫고 한 벌의 옷은 피어난다. 바늘과 실과 직물은 한 벌의 꽃이 피는 개화의 순간을 위해 뭉친다. 인간의 몸을 어루만지는 소재를 이용해, 영혼에 입힐 언어들을 끄집어낸다. 인간의 생이 남루하거나, 화려하거나, 혹은 매혹적이거나, 어떤 상황을 꿈꾸든, 디자이너는 인간의 욕망을 기워 한 벌의 옷으로 만든다. 결국 옷을 만드는 일은 희망을 깁는 일인 것이다. 패스트 패션의 폭력 속에서,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테일러링을 하는 이들은 나지막하게 옷의 목소리를 발화한다.

"우리는 여전히 지금 이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트렌드, 변화, 리듬 이런 단어에 숙명적으로 끌리는 나다. 패션 큐레이터로 옷에 대한 생각을 나누겠다는 마음엔 변함이 없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10년 후에 어떻게 변해있을까를 타진하는 사람보다, 10년 후에도 변하지 않을 것들을 채집해, 가슴 속에 쟁여두고 시린 사랑을 하는 이가 되어보자고. 나의 큐레이션은 이렇게 시작한다. 큐레이션이란 단어는 서양의 중세 때만 해도 교회의 직급을 뜻하는 말이었다. 교회와 회중을 연결하는, 회중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영혼을 위무하는 존재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영혼을 큐레이팅한다는 표현이 있었다고 옥스퍼드 사전이 알려주었다. 그래 결심해본다. 진짜 큐레이션을 해보기로. 이 단어의 뿌리에 가서 닿아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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