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영화 나의 독재자 리뷰-세상의 모든 아빠는 왕을 꿈꾼다

패션 큐레이터 2014. 11. 19. 14:42



나는 왕이로소이다


영화 <나의 독재자>는 만년 연기지망생 아빠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흥행유무를 떠나 이 영화를 통해 몇 가지 지나온 제 삶의 날을 떠올려봤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군사독재시절에서 1994년 7월까지입니다. 제가 군대 일병휴가를 나올 때 김일성의 사망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귀대해야 했던 그때가 생각났지요. 더구나 주인공을 맡은 극중 아버지는 가난한 연극인이었습니다. 힘들게 풀팅(포스터를 벽에 붙이는 일)을 해가며 길 지나가는 역에서 언젠가는 리어왕을 연기하겠다는 신념을 가진, 그러나 희망이 그닥 보이지 않는 연극배우였습니다. 


남북공동성명을 앞두고 '리허설'을 해보기로 했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죠) 그래서 김일성 주석 역을 해야 할 배우가 필요했던거죠. 그렇게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발설하지 않을 배우를 찾았나 봅니다. 만년 지망생인 아빠는 이렇게 배우가 됩니다. 김일성이 되기로 작정하는 것이죠. 말투에서 사고까지, 김일성이 되어갑니다. 하루에도 짜장면을 수도 없이 먹고, 뱃살을 찌우고, 영사기를 통해 본 김일성의 담배피는 모습을 연습하고 발성을 훈련하죠. 어디 그뿐인가요. 당시 중정에서 모진 고문을 받던 서울대 국문과 학생을 선생 삼아 정신교육까지 받습니다. 



생의 반전은 반드시 온다? 


통일이 평생 꿈인 아버지를 위해 가족이 거짓말을 하는 <간 큰 가족> 독일 통일을 믿지 않는 어머니를 위해 거짓말을 해야했던 <굿바이 레닌> 같은 영화들이 아마도 이번 <나의 독재자>같은 영화의 전신이 아닐까 싶은데요. 아버지는 모진 고문에의 기억 때문일수도 있고, 아들에 대한 약속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마지막 생의 반전(?)을 위해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 아빠가 됩니다. 하지만 그 아빠의 리어왕 대사를 듣는 순간 소름이 돋게 되죠. 세상의 모든 아빠들은 아이들을 위해 왕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 왕이 꼭 권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저 당당한 아버지가되고 싶은 거겠죠. 몸과 마음이 김일성이 되어버린 배우에게, 남조선은 어떤 나라였을까요? 한 체제의 우수성이 다른 대안들을 막을 때, 그 체제는 내면에서 부터 썩어갑니다. 우리가 만든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살펴봐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지요. 



리어, 나의 진정한 리어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에는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죄악에 황금의 갑옷을 입히면, 날카로운 정의의 창도 상처를 내지 못하고 부러져 버린다"라고. 정치 지도자의 도덕적 결함을 발견하고도, 그저 배부르게 살 수 있다는 생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지도자를 세우고 그에게 황금 갑옷을 입힙니다. 이 경우 아무리 투표를 하고 저항을 해도 그 정의로운 절차의 힘이 갑옷 속에 숨은 죄악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가난이란 것은 참 신기한 마술 같다. 보잘 것 없는 게 커 보인다"라고 리어는 말합니다. 오만한 자는 광기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광야의 들판에 던져지고서야 뉘우친다. 어디 이 세상이 연극 속 세상과 다를까요. 연극의 힘은 무대 속의 세상에 우리를 비추어보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현존의 힘이고 무대를 통한 인간 감성의 교육이지요. 



진실이 개가 되어버린 시대에


이 영화에서 가장 화나는 캐릭터는 중정의 오 계장입니다. 독재정권 때는 고문경찰로, 민정이양이된 이후에도 아부 속에서 살아남은 권력의 실체죠. 중정에서 애먼 민간인을 폭행하고 고문하면서도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일했다고 자부한다는 이들의 논리. 오 계장이란 인간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실제로는 자신의 삶을 위해 타인을 숙청해온 인간일 뿐이죠. 자기가 기획한 연극을 해보자고 정신이상이 되어버린 이 배우를 결국은 청와대로 끌고 갑니다. 극 중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토해내는 리어왕의 대사를 듣고 비아냥 거리던 그 모습이 떠오릅니다. "예술이네 미친새끼" 지금도 권력자들이 우리의 아버지들을 그런 시선으로 비웃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아들에게 만큼은 리어왕이 되고 싶던 남자. 아버지의 마지막 사자후가 화면에 깔립니다. 


"리어의 눈은 어디에 있느냐 지금 깨어 있는 것이냐? 아니 꿈이겠지.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사람은 누구냐. 리어의 그림자여, 진실은 개가 된지라 매질을 당하여 들판으로 쫒겨나가고, 수레가 말을 끄니 왜 바보 당나귀가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겠는가. 어느새 광대들의 인기도 식어 취해있는 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네. 그들은 하는 짓이 바보 광대짓 같구나. 그와 같은 왕이 숨바꼭질하여 바보들의 무리에 섞여 있으니 그들은 별안간 기뻐서 울었고 나는 슬퍼서 노래했네 늙고 애처로운 왕이시어 당신의광대에게 거짓말 하는 법을 가르쳐주오 나는 거짓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소" 


삶이 거짓말로 점철된 정치가들에게 리어의 대사는 그저 미친새끼의 푸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술취한 자들은 누구인가요? 여전히 이땅을 분단이념의 틀 속에, 지역갈등과 세대 갈등으로 옳아매며 자신의 권력만 유지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정녕 '거짓말하는 법'을 배워야 하나 봅니다. 취해있는 자들이 무대의 광대들을 대신해 바보 광대짓을 하는 동안, 무대 밖의 우리가 저 배우들을 감지하고 잘라내지 못한 것, 그것이 우리의 죄가 되겠지요. 하지만 이 영화는 이런 정치적 시선을 넘어, 아들에게 지키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지막 약속에 더 방점을 찍습니다. 그가 힘없는 연극배우였기에, 여전히 무대에서 영혼을 빼오지 못한 제겐 더 와닿았는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