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Travel/해를 등지고 놀다

박수근 미술관에서-헐벗은 세상을 위해 꽃으로 차린 밥상

패션 큐레이터 2014. 8. 25. 02:39



 지난 토요일 강원도 양구에 있는 박수근 미술관에 다녀왔습니다. 

아트미션 2014년 포럼이 열려서 겸사겸사 박수근 회화에 대한 심포지엄도

열렸기에 다녀온 행장입니다. 올해가 박수근 화백이 태어난지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박수근 선생님의 그림도 좋아하지만 사실 이번 

여행은 미술관 건축을 보고 싶은 생각도 많았습니다. 건축가 이종호 선생님

이 미술관을 건축하면서 써놓은 단상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 건축이 가장 건축다운 순간은 바로 그 속에 우리들의 삶이 담겨지는 장소가 될 때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 삶을 충동할 수 있는 장소 이상의 어떤 의미를 지닐 때이다. 삶이란 자기 안에 

깃들인 생명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관계들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기에 삶은 하나의 커다란 관계망 위에 놓인 생명실현의 흐름이기도 하다. 건축이 만일 이와 같은 관계망 위의 

삶들을 담아내며 구축해 나가야 하는 것이라 한다면, 우선 먼저 건축이 해내야 할 일은 나와 너를 만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망의 흐름 밑바닥에 깔린, 그들을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 힘들을, 장소와 

공간 그리고 사물이 가진 맥락과 감각의 질에 결합시키는 일 또한 건축이 해 내야할 것이다."



돌과 콘크리트, 목재를 이용해 축조한 박수근 미술관은 그의 회화에서 보이는 

마티에르, 바로 표면성을 건축으로 오롯하게 옮기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건축물을 따라, 아내와 산책을 하며 돌을 쌓아 만든 1전시실의 표면을 손으로 훑다보면 투박

하고 거친 외면 속에서 화가의 따스한 온기가 느껴집니다. 절실한 기독인으로 살며 그림을 그렸던 

화가답게, 그를 둘러싼 자연과 그 속에서 마치 붓으로 베어낸듯한 시간의 조각에는 누군가를 누르거나 중압

하지 않고 우리 내  질박한 삶을 함께한 이들의 그림자가 담겨있습니다. 박수근 회화의 본질이겠지요.



나선형의 대지에, 유리로 지은 꽃봉오리 형상으로 건축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건축가는 화가의 그림을 면밀히 연구하며, 회화적 의미를 공간으로 환원하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산책하는 골목골목, 화가를 위한 사념에 빠질 수 있는 장치들이 많습니다. 



작은 숲길, 아래 벤치에 앉아 책도 읽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느덧 시작된 강의, 빼곡히 채운 150여명의 자리 한켠을 차지하고 

강의를 듣습니다. 



겸재 정선미술관의 관장님으로 계신 이석우 선생님의 발제로 

첫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이어 서성록 교수님, 공주형 선생, 안용준 목사님의

강의도 들었습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화가와 작품에 대한 관점이 조금씩 

정리가 되더군요. 강의 중에서 와닿던 분은 큐레이터 출신의 공주형씨의 강의였습니다. 대중 

미술서도 많이 내셨던 분이라 제겐 익숙하죠. 이분이 박수근 화백을 테마로 박사학위를 하셨던 건 이날

알았네요. 철학자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박수근 회화의 미덕을 풀어내는 내용이었습니다. 

레비나스는 흔히 타자의 철학으로 잘 알려져있죠. 화가에게 있어 자연, 사람, 주변

이 대상들과 마주치고 조우하는 시간들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강의가 끝나고 질의응답도 이어집니다. 


박수근 <집으로 가는 길> 1964년, 하드보드지에 유채


저는 그림은 그리움을 그리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일한 어원을 갖고 있다고 알고 있죠. 그리워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대상이 가진 특질이나 미덕, 장점 때문만은 아닙니다. 나와 타자, 남과의 관계가

단순히 살을 맞대는 물리적 인접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윤리적

연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레비나스 철학의 본질입니다. 이 말은 상대방이 삶에서 겪는 불편함이

나라는 존재의 거울속에 어떻게 비치고, 어떻게 연결되는 가의 문제와 관련을 맺습니다. 

박수근 회화에서 이웃은 항상 고통을 공유하는 존재라고 공주형씨가 말하더군요. 



강의를 듣고 산책 길에 나섰습니다. 앞에 보이는 박수근 화백의 동상이 있고

그 앞에 펼쳐지는 작은 개울이 바로 대표작 <빨래터>의 배경이 된 곳입니다. 



그림 속 배경과 닮아있나요?



두 차례의 강의가 끝나고 바이올리니스트 백진주 교수님의 

연주가 이어졌습니다. 그림과 선율과 건축공간이 하나가 되어 그 속의 

인간을 따스하게 껴안습니다. 눈물나게 좋은 연주였네요. 



토요일 하루를 빌려 다녀온 작은 여행이었습니다. 가는 길, 오는 길

차는 엄청나게 막히고 힘들었지만, 고즈넉한 미술관 풍경 마음 속에 담아두고

회화 속 저 안온한 세상의 사람들을 눈에 담아옵니다. 화가가 질박한 세상을 위해 붓으로

그려 차려낸 정신의 밥상을 한술 뜨고 나니 힘이 납니다. 예술의 힘이겠지요? 

이제 집으로 가야겠습니다. 내가 담아내야 할 생의 온기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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