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Travel/해를 등지고 놀다

수덕여관에서-이응로와 박귀희, 두 사람의 애닮픈 사랑에 대하여

패션 큐레이터 2013. 7. 28. 17:35


휴가철이 다가옵니다. 저는 일찍이 홍콩에 다녀오느라 이번에는 

조용히 책 읽고 단행본 수정이나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시간을 내어 충남

예산에 자리한 천년고찰 수덕사에 다녀왔습니다. 아울러 근처의 온천에도 들러 잠시

몸을 풀었습니다. 수덕사 근처의 산채정식집들이 유명하다고 해서 한번 먹어

보기도 했고요. 오랜만에 나물들과 청신한 야채들을 먹으니 좋네요.



수덕사 가는 길에 미술관이 있어서 들러봤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계단을 올라가니 수덕여관이란 곳이 나오더군요



이 수덕사 가는 길의 미술관에는 수덕여관과 관련을 맺고 있는

한국의 근대사에서 주요한 화가의 작품이 대거 걸려있습니다. 바로 고암 

이응로 화백의 작품이지요. 물론 이 수덕여관에 머물렀던 두 명의 또 다른 예술가가

있습니다. 바로 나혜석과 일엽스님입니다. 일엽은 원래 문인입니다. 그분의 글을 읽어본 분은

알테지만, 당시 가부장적 억압 속에 살아간 이 땅의 여성들의 삶이 그녀라고 비껴나가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회한과 답답함이 작품속에 우러나죠. 나혜석의 그림을 좋아

하게 된 건, 우연히 한국의 현대복식사를 조직하는 과정에서였습니다. 그녀가

그린 일제 치하 속 한국 여성들의 옷차림 속에서 서양복식의 흔적들이

너무나 잘 묻어난 한 장의 그림을 발견하면서 부터였습니다.



비온 뒤 개기 시작한 나지막한 회청색 하늘아래, 젖은 지면 위로 

발걸음을 향합니다. 고암 이응로와 박귀희 여사의 사랑이 녹아있는 곳.

그러나 그 사랑은 자신을 버린 화백과, 그를 향한 망부가가 서려있는 곳입니다.

솔직히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들으면 화납니다. 요즘 관점에선. 솔직히 아내 버리고 

떠난 인간이고, 그런 인간을 옥바라지까지 하면서 기다렸지만 정작 자신은 21살의 연하의 제자와 

결혼해서, 프랑스로 떠났지요. 하긴 자기도 본처 얼굴을 볼 낮짝은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예술가의 생을 그리면서 지나치게 신화로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화가나는 건, 성경에도 남자가

아내를 떠날 때 분명하게 이혼에 대한 선포와 더불어 법적 처리를 하라고 써놨습니다. 이걸

안한게 남자들인게죠. 못난 남자들이고 시쳇말로 참 쿨하지 못한 찌질이들입니다. 



지금 대전의 이응로 박물관의 명예관장님이신 박인경 여사님의 가슴이

아픈것도 매한가지. 본처에 대한 죄의식, 남편에 대한 사랑, 혼잡스럽 상처의 풍경 

을 더듬으며 그녀는 오롯하게 남편의 작품을 남겨 오늘날 화가 이응로의 삶을 살펴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저기 수덕여관이 보이는 군요. 그냥 이래저래 비온 뒤 여관을 걷습니다.



쇠락한 여관은 이제 과거의 기억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수덕사를 찾는 분들, 혹은 문학기행이나 화가의 행로를 찾는 이들에겐

작은 자료관으로서의 성격을 띄며 사람을 맞습니다.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작품들을 사고, 작가들을 만나고 있지만 

이들의 삶에 대해, 항상 당대가 규정하는 뾰족한 칼날 만으로는 당췌 

해석하기 힘든 부분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화가라고 해서 다들 하나같이 

무슨 조강지처 버리는 게 특기고 사회생활이 제로인양 알고 있는 분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화가도 부지기수고요. 항상 그들을 향한 마음은 두 갈래길로 갈라집니다.



글을 쓰다보니 마음이 꿀꿀해지네요. 지나간 날들의 기억을 

타인의 관점에서 훑는 건 이렇게 쉽지 않으면서도, 설령 그것을 쓰는 

일은 가치판단의 문제를 자꾸 개입시키는 측면이 있어서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어제도 리움에 가서 알렉산더 칼더전을 보고 뮤지엄 1에 가서 이응로 화백의 그림 한장을 

봤습니다. 그가 그린 문자추상은 곧 인간의 연대와 함께 손잡은 우리의 모습이기에 요즘과 같이 

마음껏 속내를, 시대의 정서를 말하지 못하는 시대일수록 그가그립기도 합니다. 촛불이 켜져도 어느 누구하나 

다뤄주지 않는 이 강팍한 시대, 독재의 퍼런 서슬은, 투명에 가까운 푸른 방패가 되어 우리의 목소리를

봉쇄하는 지금, 수덕여관에서 느끼는 작은 정서들이 마구 엉켜들기만 하는 군요. 애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