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책 읽기의 황홀

인문학에 빠지는 이유, 도서관 앞 산책길에서

패션 큐레이터 2013. 4. 14. 20:52

 


내가 사는 워커힐에는 가까운 곳에 광진정보 도서관이 있다. 밤 10시까지 하기에 퇴근 후 자주 가서 자료를 찾고 글을 읽는다. 정기간행물실과 잡지들을 자주 보러 가고 주말에는 책을 빌려다 읽는다. 3층 열람실은 한강이 바로 보이는 창 아래, 도서대에 책을 올려 놓고 있으면 아주 시원하다. 오늘은 드디어 긴 겨울을 마무리하고, 도서관 주변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아주 기분 좋은 하루다. 일년에 한번 씩, 도서관 앞에서는 신간 서적을 30퍼센트 할인해서 파는 행사가 열린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부랴부랴 가보았다. 


2012년 겨울에 나온 책들이 주를 이루기에, 거의 새책을 다소 싼값에 살 수있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단체는 여기에서 나온 수익금을 도서관 유지 및 신간 구매에 쓰기 위해 사용한다고 한다. 여튼 이런 계기로 좋은 책을 손에 넣었다. 우선 <노년의 역사>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지만 소장하고 싶던 책이다. 노년이란 인생의 시기를 역사 속에선 어떤 관점으로 보았는지를 설명해 놓은 책이다. 패션공부에 도움이 되는 책이다. 패션의 화두는 안티에이징이다. 적어도 화장품 회사의. 인간이 안티에이징이란 개념을 어떻게 내면화하고 이것과 싸워왔는지,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많은 걸 추론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최근 지인들과 음악회를 자주 다니게 되면서, 클래식 음악과 이론을 간편하게나마 다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음악관련 책을 두 권을 골랐다. 작곡가 중심으로, 또 하나는 범용적인 음악사와 상식들을 재미있게 풀어놓았다. 


골라놓고 보니 인문학자들의 책이 많다. 대부분 역사와 철학, 문학비평등이 주를 이룬다. 정작 전공한 마케팅 전략이나 회계학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훑어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부족함을 느꼈던 것도 아니다. 마케팅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 시장의 역동성과 소비자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기에, 단순한 트랜드 분석책이나 잠시 반짝하는 '제목장사질'에 열을 올린 마케팅 책들은 바로 눈에 걸린다. 통계학을 한번 더 깊게 보는게 낫다. 어제 존경해 마지 않던 구본형 선생님께서 타계하셨다. 


아이엠에프 시절, 사회초년생이 된 나는 그분이 쓴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란 책을 참 달콤하게 읽었다. 구구절절 변화란 화두를 개인과 조직, 사회 전체를 통해 엮어내는 그의 시선은 오롯하게 인문학자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요즘은 이런 자기계발서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대충 힐링을 표방하며, 또 다른 한편에선 신자유주의 시대의 생존에 대한 가멸찬 원리들을 늘어놓는다. 자기개발서는 이 땅의 새로운 종교가 된지 오래이고, 그 종교를 믿는 이들은 주일 교회를 출석하듯, 책을 사서 일주일간의 위안을 얻는다. 


모든 성공과 실패의 과정에서 '개인'이 최상의 가치를 점유한다. 내가 구본형 선생님의 글을 좋아했던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대학시절 적어도 경영학을 공부할 때, 판에박은 듯한 이론을 외우며 익혔던 변화관리의 원리들을, 자신이 실제로 일했던 회사의 변화관리 과정을 통해 풀었던 최초의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론은 항상 '바로 지금'이 누적되면서 나온다. 일종의 귀납적 추리로서, 보편의 메시지가 될 만한 내용들이 추려져나온다. 물론 이 또한 개별 기업의 상황에 따라, 적용의 방식이 달라야 한다. 


출판사 편집자들이 경영과 패션을 묶어서 책을 써보라고 채근할 때가 많다. 항상 고사를 했던 것은 사례 중심의 책을 쓰고 싶지 않아서였다. 사례는 항상 달콤하게 사람을 사로잡고, 왠지 바로 내가 있는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을 듯한 환상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현실이란 맥락은 사례 속 기업이 성장하면서 내적으로 육성시킨 문화와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여전히 인문학을 읽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