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집을 손에 들다 서울대 불문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오생근 교수님의 <프랑스어 문학과 현대성의 인식>이란 평론집을 들었다. 한달음에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길 만큼, 쉽고 간결하게 오랜 세월 문학작품을 읽으며 농축해놓은 자신의 시선을 늘어놓는다. 쉽고 간결하게 썼다고 해서 내용마저 쉬운 것은 아닐 터. 최근 출판계에 불어닥친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에 대한 생각에서 부터, 예술가로서의 개인이 등장하던 낭만주의 시기에서 초현실주의까지의 약사, 시인 보들레르의 산문집 <파리의 우울>을 통해 읽는 근대의 자궁, 파리의 면모들, 나아가 사트르트와 롤랑 바르트의 문학평론 방식을 비교해 놓은 글에서는 나도 탁 하고 무릎을 쳤다.
최근 모더니티(Modernity)란 주제를 놓고 본격적인 고민을 하고 있다. 인문학을 좋아하는 분들의 손을 이미 한번쯤 거쳤을 발터 벤야민의 글을 이제서야 읽는 것도 그런 이유 일터(대학시절 영상이론을 공부하면서 그분의 논문 한 편을 읽은 게 다다) 일방통행로를 비롯한 그의 사유의 근저에는 센강을 중심으로 좌안과 우안으로 나뉘어, 백화점과 금융, 보험등 상업지구가 들어서던 우안의 거리들이 있었다. 아케이드와 세계 최초의 백화점 봉 마르셰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유래없던 쇼핑문화가 일종의 혁명처럼 일어나던 때다. 패션도 그래서인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고.
이런 내게 오생근 교수님의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셨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통해, 그가 얼마나 근대적 지식인이며, 현대성이란 이름을 붙여도 될 만한 사람인지 다시 알려주었다.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이 시대의 실루엣을 그리던 때, 편협한 광신의 시대에서 온건한 정신을 안고 살기란 쉽지 않았을 터다. 절대주의적 가치관이 지배한 시대에 상대주의적 가치관을 견지하며 보편적 인간에 대한 성찰을 모색했다는 점. 그런 점에서 몽테뉴의 글은 작금의 한국사회에도 울려주는 바가 크다. 정치적 이념의 격전지, 새롭게 선출된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 이념의 틀을 씌워 생각의 자유를 막으려하는 이들이 오늘도 온라인에서는 전쟁을 벌인다. 몽테뉴를 다시 읽다 -숨을 쉬어야 하기에 읽어야했던
이런 이들에게 몽테뉴는 과장되거나 감상적인 자아가 아닌, 그렇다고 불안과 권태, 나아가 불만 가득한 볼멘 소리만 하는 지식인이 아닌, 보편적 인간의 원형이 추구해야 할 길을 보여준다. 인간의 우정과 관습, 종교, 도덕, 여행, 교육,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중심으로 섬세한 관찰에 기초한 자아를 조형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는 주관적이 되기 쉬운 상상의 세계와 주관성이라는 협소한 세계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깊고 서늘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법을 깨달은 자아다. 여행에 대한 몽테뉴의 글도 와 닿았었다. 오로지 자기 네 세계만을 기준으로 아는 이들에겐 여행은 그저 '돌아오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 여행을 통해 삶의 지평이 넓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사는 기득권의 세계가 안온하다는 '가슴의 쓸어내림'만 강조하는 인간들이 꽤 있다. 몽테뉴는 이미 일찌감치 이런 인간상들의 면모를 살펴보며 냉철하게 조언을 한 것이다. 유럽인들이 식인종이라 부르는 관행에 대해서도 프랑스인들의 야만성을 기준으로 들어서 비판한다. 식인종이라 불리는 이들의 문화를 빌어 자아비판의 기회로 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식에 갖혀서 사는 현학자가 아니었고 독단적인 확신에 사로잡혀 타인의 생각을 함부로 재단하는 이가 아니었다. 오생근 교수님이 인용해서 풀어놓은 부분을 다시 인용해본다.
"우리에게는 자기들이 가보고 온 지방을 개인적으로 말해주는 지정학자들이 필요하다. 물론 그런 학자들은 당연히 팔레스티나를 보고 왔다는 것을 앞세워 세상의 모든 다른 지역을 이야기할 수 있는 특권도 누리려고 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아는 것을 쓰고, 알고 있는 만큼 다른 문제에 관해서도 써주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정도밖에 모르지만 강이나 샘물의 성질에 대해서는 어떤 특별한 지식이나 경험을 갖추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작은 영역의 지식이 널리 유포되도록 하기 위해서 물리학 전체를 기술하려는 야심을 보일 것이다. 그러한 악습에서 여러 가지 많은 혼란이 생긴다"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몽테뉴는 이렇게 자신이 알고 체험한 지식을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의 미덕과 필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그가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논리를 전개해가는데 동원될 수 있는 과장과 허위의 요소들을 동시에 경고한다" 이 해석을 읽는데 속이 시원했다. 우리 사회에는 자칭 타칭 수많은 멘토들이 있다. 자기계발류의 멘토에서, 인문학과 문화이론을 무장했다고 자칭하는 자들도 많다. 이들의 특성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를 넘어, 너무 지나치게 자신의 관점으로 모든 걸 포장해내려는 우를 범한다는 것이다.
언론이 띄워주니 기고만장하는 부분도 있지만, 어떨 때는 과도하다는 느낌이 든다. 언제부터인가 이땅의 인문학은 소비를 위한 상품처럼 되어버려서 누가 유행하면 너도 나도 그 철학자를 신봉하고 읽고 소비한다. 정말 알고 인용을 하는지 이해가 안가는 글들을 올려놓고 그들의 힘에 덧입어, 자신의 지적우월과 촉수의 범위를 자랑하려는 것은 아닌지. 한 개인의 문제는 아닐 것 같다. 생의 갈래 길 중 작은 무늬 하나를 읽어낸 이론을 세상을 읽는 총체적 담론으로 만들려는 욕망. 몽테뉴가 살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자신의 지식이 자칫 빠질 수 있는 허위와 과장의 덫에서 참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나 또한 자칭 패션의 역사와 미학, 소비문화등 다양한 영역의 글을 읽고 쓴다. 철저하게 패션이란 렌즈를 갖기 위해, 인문학도 좋지만 요즘은 한 벌의 옷을 실제로 만드는 일, 바느질하고 염색하고, 안감을 고르고, 가죽을 무두질하고, 좋은 가죽을 고르며 보내기도 한다.
이는 언어로서의 의상에 대한 해석에 매이지 않기 위해서다. 패션은 철저하게 인간의 물질문화를 드러내는 지층이다. 그 지층을 볼 때는 일반화된 추상성보다 구체적인 꼼꼼함과 살아있는 감성도 필요하다. 옷은 특히나 촉각과 시각이 동시에 사용되어 읽어야 하는 것이라, 기호학을 비롯한 언어모델로는 깔끔하게 가려운 데를 긁어주질 못한다. 균형을 맞추는게 참 쉽지않구나 하고 한탄할 때쯤, 오 교수님의 평론들을 읽으며, 생각의 광맥을 만난 느낌이다. 참 감사하다.
좋은 책은, 그 책을 읽고 감동을 받는 것도 좋지만, 그 책을 통해 다른 책을 연속해서 읽어내고 싶은 욕망과 힘을 주는 책이란다. 잘 쓰여진 평론집 한 권 덕분에, 몽테뉴의 수상록과 독일의 평전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몽테뉴 평전, 이외에도 두 권의 또 다른 몽테뉴 해설집을 읽는다. 건강한 독서를 하게 되어 참 기쁘다. 읽고 이해하는 부분만 정리해서 올려보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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