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큐레이터의 서재

영국패션의 본질을 배우는 시간-엘리스 템퍼리의 도록을 읽으며

패션 큐레이터 2012. 6. 20. 18:22


외국의 주요 패션 전문 출판사들을 보면 참 부럽기 그지없다. 

각 나라의 디자이너들을 일종의 보석처럼, 도록을 만들고 전시를 주최하며 

그들이 가진 창의적 소산물을 법적으로 보호한다. 이번에 산 True British 는 영국이 낳은

디자이너 앨리스 탬퍼리(Alice Temperley)의 10여년 간의 작품을 담아 소개하는 디자이너 카탈로그다. 

한국에는 이미 2007년, 한국에 들어온 영국 브랜드다 보니, 이름을 아는 이도 꽤 된다. 작년 해외에 

출장갔다가 타겟 매장에서 본 그녀와 타겟과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만든 자전거가 유독 눈에 

들어왔었다. 철조 프레임 위에 당당하게 앨리스라 써놓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앨리스 템퍼리는 사과농장을 하던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대학을 가던 해, 런던으로 이주했다. 런던 컬리지 오브 아트와 세인트 

마틴 에술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2000년 남편과 함께 자신의 브랜드 템퍼리 런던을 설립.

영국 전통의 장인의식이 베어나는 꼼꼼한 공예정신이 깃들은 그녀의 옷은 

많은 셀러브리티들의 사랑을 받았다. 할 베리, 사라 제시카 파커

에바 멘데즈, 클레어 데인즈, 시에라 밀러 등 수도 없다.



그녀의 장점은 무엇보다 런던 컬리지 오브 패션에서 미술을 전공하며 

익힌 수많은 시각적 자료들의 해석법과 여기에서 추출해내는 영국풍의 미학이다.

그녀는 직물을 매우 꼼꼼하게 사용하는데, 이 또한 세인트 마틴에서 배운 직물 테크놀로지와 

프린트 기술에 크게 힘입고 있다. 이런 면모들을 결합되어 앨리스 템퍼리라는 브랜드의

유전자를 만드는 것이다. 한편으론 부럽고, 또 한편으로 이런 시스템을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이 나라가 한탄스럽다. 



예전 국내의 의상학과 교수들과 간담회를 가진 적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패션은 '유학을 다녀오지 않고는 힘들다'라는 사고를

갖고 있었다. 물론 유학은 사고의 지평을 넓히고, 무엇보다 디자인이라는 행위를 

가능케 하는 원초적인 유연성을 늘이기에는 최적의 방식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패션 분야는

유학없이 뛰어들 수 없는 장을 만들고 교육해온 그들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 싶다.

학문을 하는 자가 아닌, 일상 속에서의 실천이 가미되는 패션 디자인이나

분야를 가르치는 자들의 일종의 책임감 부족이 아닐 까 싶다. 



알렉산더 맥퀸의 해제를 쓰면서, 그가 걸어온 삶의 이력들을 

샅샅이 뒤지며 느낀것은, 패션은 '주둥이'로 하는 게 아니라, 리서치의 

힘으로 한다는 것이다. 아니 이것은 모든 디자이닝(Design) 행위의 토대일 것이다.

맨날 아카이브를 만드네, 패션 박물관을 만드네 하며 이래 저래 관공서들과 정부부처를 다니는 

일도 조금씩 지친다. 하나 같이 자문위원이랍시고 올려놓은 교수들은, 그저 뭔가를 짓고 설립하는 것을 

자신의 업적으로 올려놓으려고, 밥 숫가락 올려놓는데만 혈안이고, 실제 몸으로 뛰고 설득하고 

사람들을 발굴하는 데는 늦장이다. 그렇다보니 실제로 패션을 런웨이에서 드라마로

연출하고 문학으로 써내고, 시각화하는 실제 인력들은 만나기가 어렵다.

맨날 모른단다. 세인트 마틴만 가면 다 해결 되는 줄 아나보다.



이런 인간들이 유학을 간다손 무엇을 배워올까? 너무나도 지나친

유학열풍, 물론 영국의 세인트 마틴이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을 배출했다고 

여기만 졸업하면 다 자신들도 그 반열에 들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한국은 항상 이런

식이다.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 놓은 길을, 그저 내가 좀 더 비싼곳에서 더 잘 배워왔다고 떠드는 

인간 밖엔 없다. 그러니 좀더 잘 베끼는 인간은 있을지 몰라도 새로운 길을 만드는 학자도

디자이너도 없다.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 또한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평생을 자신의

생각이 아닌 철학자 누구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들에게 뭘 배울까?



앨리스 템퍼리의 도록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건 다름이 아닌 

자신이 갖고 있는 것들을, 시간의 흐름 속에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스스로 그 의미의 주체로 서려고 하는 디자이너들의 노력이다. 영국에 가서 공부를

한다고 별나게 뛰어난 디자이너가 되는 건 아닐거다. 물론 그곳은 너무나도 좋은 학습의 환경을

갖고 있지만, 빅토리아 앤 앨버트가 있다고 해서, 수많은 갤러리가 있다고 디자인의 영감이 나오는 건 아니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패션에 대한 담론이 없는 사회다. 디자이너의 책임으로만 돌리기엔, 시즌별로 

먹고 살기 힘든 이들에게, 자신의 작업을 스스로 아카이브화하고 테마별로 의미화 작업을

맡기는 건, 현재의 시스템에선 불가능하다. 영국적, 프랑스적, 한국적 패션이란

화두를 진심으로 풀고 싶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디자이너

들에 대한 재교육이다. 구성의 틀을 바꾼 배움의 방식이다.



전통을 현대화 한다는 것은 절대로 일희일비해선 안될 일이다.

그만큼 과거의 것을 현재의 의미와 만나고 조우하게 하는 건 쉽지 않다. 

그저 한글을 찍고, 단청을 찍고, 오방색을 쓴다고 한국적인 패션이란 착각을 하면

안된다. 우리 앞에 놓여진 사회는 더 이상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란 수사가 의외로 먹히지

않는 사회다. 무국적의 보편성, 그 속에서 알음알음 드러나는 우리 한국인만의 수사학, 이것이 그들의 

정서에 부담없이 결합될 때, 각 나라의 패션은 세계패션이란 거대한 화두를 푸는 열쇠가 된다. 

단청을 찍고, 한국의 산하 풍경을 찍는 건, 그 화두를 향해 가는 과정의 일환이지

그것 자체가 답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정신 차려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