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필로소피아

한국에 예술교육의 아카이브가 필요한 이유

패션 큐레이터 2012. 2. 10. 20:26

 

 

 

패션 아카이브를 꿈꾸며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멋진 패션 아카이브를 갖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걸 꿈꾸고 싶지도 않고 별로 그럴 가능성도 없습니다. SNS가 여론형성의 새로운 기저가 되었습니다. 타인에게 공감의 빚을 지고 산 자들이 인기만 믿고 추종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걸러지지 않은 취향과 논평'을 책임없이 던지는 과잉연결의 시대. 저는 이런 인생의 우를 범하며 살 능력도, 그럴 마음도 없습니다. 패션의 길을 가고 싶고, 블로그와 페이스북, 최근에 시작한 트위터도 그런 소통의 일환일 뿐이죠.

 

패션 아카이브를 짓는다고 정부나 혹은 지자체에서 문의를 해오거나 자문 형식으로 위촉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좋은 프로젝트일 경우라면 가진 지식과 경험을 다 내놔야 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패션뮤지엄 건으로 요즘 열심히 많은 분들을 만나고 다닙니다. 이틀 전에도 패션협회에서 열린 <창의적 패션 디자이너 교육 수료식>에 다녀왔습니다. 런웨이와 스토리텔링을 주제로 패션 아이템에 이야기의 가치를 구현하는 방식에 대해, 역사와 미학을 통해 살펴보는 강의를 한 탓이었지요. 디자이너 박윤수 선생님도 뵙고 글 잘쓰는 패션 디자이너 심상보 선생님도 뵈었습니다. 브랜드 스토리텔링으로 한국에서 가장 많은 저서를 가진 김훈철 선생님을 뵌 것도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패션 아카이브와 뮤지엄을 짓는 문제로 머리가 아플 때마다, 항상 첫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해외사업으로 살아왔던 인생이고, 프랑스의 한 전자회사와 거래를 위해 찾아간 8 년 전, 문득 자주 들렀던 파리이고, 수도 없이 간 퐁피두인데, 그날 따라 미술 도서관이 어찌나 그리도 부럽던지요. 디자인과 미술 전문 도서만 모아놓은 그곳에 전공학생들이 모여, 숙제도 하고 자료도 찾고, 여느 도서관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지만,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맨날 디자인이 국부의 원천이고 상상력이 힘이고 어쩌고를 떠드는 분들, 말로만 하시는 분들. 하지만 말 뒤에서, 실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 분들을 생각합니다.

 

정부에 맡겨봐야 자기 임기내에 하드웨어만 만들어서 '제가 했습니다'만 자랑하기 좋아하는 분들 일색이고. 제가 지금껏 모은 자료나 정부에 기증해달라고 전화하는 분들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전화하지 마세요. 저는 민간의 힘으로 해낼 것입니다. 비록 지금 정부와 패션 뮤지엄을 위해 타당성을 검토하고 힘을 캐어 일하고 있지만, 아카이브와 소규모의 쇼룸과 컬렉터 룸을 만드는 건 제 몫입니다. 이곳에서 저는 장기집권이 아닌 장기집권을 하려 합니다. 이게 나쁜가요? 무슨 국립박물관이든 뭐든 예술단체의 장이란게 정권이 바뀌면 그저 따라서 바뀌는게 당연한거고. 이도 모자라 임기도 못채우고 쫓겨나고. 이런 나라에서 무슨 일관된 예술의 흐름이, 운동이, 학파가 나온단 말입니까? 디자인의 철학과 원칙이 어디 5년마다 물갈이 되는 줄 아십니까?

 

대학교수들은 번역대신 18페이지 남짓 해외자료들이나 덕지덕지 베낀 허접한 논문이나 내고, 연구기금까지 받으며 쓰는 풍토에서, 더 이상 새로운 번역도 없고, 그 번역을 민간에서 하느라 몸도 아플 지경입니다. <알렉산더 맥퀸>책도 이제서야 나오네요. 제가 해제를 쓰고 있습니다. 툭하면 디자인이 살 길이다.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어쩌고 저쩌고 떠드는 평론가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말처럼 후세를 위해 자료를 모으고 이를 컬렉션하고 물려줄 생각은 없나 봅니다. 아니면 자료가 없거나요.

 

그래픽 디자이너 홍동원 선생님이 그러셨죠. 디자인은 결국 자료의 싸움이고 이 숲을 헤치며 리서치를 하는 시간을 통해 만들어진다고요. 디자인이 말만 예쁘게 하면 다 튀어나오는 건줄 아는 분들 뵈면 막막합니다. 디자인은 축적된 정보의 힘에서 나오는 코드들을 지적으로 가지고 노는 일입니다. 오늘 사진 속 풍경은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있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의 도서관입니다. 그의 자료실이죠. 일흔을 훌쩍넘은 그의 인생 전반에 디자인에 도움을 준 모든 자료입니다. 수십 만 권이라더군요. 개인 도서관이 이 정도인 나라와 패션잡지 몇 년치 갖다놓고 디자이너들에게 센터라고 지어주는 나라의 차이.

 

하여튼 올해도 열심히 아카이브를 위해 자료구매에 더욱 많은 예산을 쓸 생각입니다. 이번 달 디자이너 도록 12권과 르네상스 복식사와 패션 저널리즘 관련 원서까지 14권을 구매했고, 앞으로는 온라인으로 미국의 최고 패션 데이터 베이스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게 목표입니다. 한 개인이 하다보니 힘들고, 버거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지치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제가 하나씩 읽으며 나누고 사용하고,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자양분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