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신의 연민을 믿는 당신에게
좋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엔, 항상 기분이 좋다. 몸이 가볍고 머리 속은 깊어진다. 영화는 시대의 정서를 반영한다. 불편한 진실을 다시 한번 대면케 한다는 점. 이것이 영화의 힘이 아닐까. 난 인도영화를 좋아한다. 예전 학부시절 3세계 영화론을 들으면서 공부했던 다양한 동아시아와 인도의 영화들은 당시 '블록버스터' 중심의 헐리우드 영화가 줄 수 없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괜히 발리우드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사티야지트 레이의 <대지의 노래>와 <아푸 이야기>를 수업시간에 보면서 <자전거 도둑>과 대비된 그의 현실인식 능력에 놀랐었다. 인도영화는 언뜻 처음보는 이들에겐 생소할 정도로, 그들만의 리듬과 음악을 삽입시키는 버릇이 있다. 제 3자에겐 꽤나 낯설지만, 이런 소품은 영화적 외삽일 뿐,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가진 힘은 그 어떤 유럽영화에 못지 않다.
영화의 줄거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이고 풀린다.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인 자키르는 힌두교도인 만디라와 결혼하지만, 9.11 참사 이후 급속도로 냉랭해진 사회의 분위기와 와중에 아들의 죽음 때문에 아내와 떨어지게 된 한 남자가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여행 이야기다. 그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은 파키스탄, 인도, 유태인, 흑인 모두를 관통한다.
오늘 글의 제목은 <종교는 왜 존재하는가>이다. 도대체 이 제목은 영화와 무슨 관계를 맺는 것일까? 가슴 속 깊이 크리스천으로 살아온 내겐, 이 땅의 종교현상, 적어도 기독교를 둘러싼 광폭한 행보는 항상 고발과 비난의 대상이었다.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독 교권의 폭력적 형태는 가일층 강화되었다. 나는 15년 넘게 다녔던 소망교회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해왔고, 그들이 떠드는 명품신앙의 허울에 대해 비판해왔다. 싸우기도 많이 했다. 내부적 모순이 강해질수록, 개신교는 항상 외부의 적을 향해 칼날을 돌렸다. 그들은 내면이 썩을수록 툭하면 이단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대통령을 무릎을 꿇게 하는 힘을 가졌다고 으스댔다.
영화 <내 이름은 칸>. 기독이 아닌 개독이 되어버린 이들에게 꼭 보고 회심하기를 바랄 만큼, 영화의 메세지는 따뜻하고 육중하다. 종교란 과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영화다. 주인공은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는 이들은 실제 내면의 모습과 달리 말이 겉도는 일반적인 우리들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말 그대로 입말과 마음의 말이 일치하지 않는 표정과 마음을 읽지 못한다. 우리는 흔히 사회적 관계를 위해 이렇게 치장된 거짓말과 표정을 짓고, 대부분은 이런 모습을 읽어내고 대응하지만, 이 야스퍼거 증후군 환자들은 이걸 못한다. 정직하게 말할 뿐이다. 이들을 통해'거짓으로 축적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단면을 바라보는 작업이 참신하고 깊은 이유다.
철학자 베이컨은 '종교적 소신만큼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내가 이 영화에서 발견한 최고의 장면은 극단적 이슬람주의자였던 지식인이 회당에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모습과 그에게 반기를 드는 주인공의 모습이었다. 극단주의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소신공양 하는 문제를 들어 '믿음의 절대성'을 강조한다. 작금의 대한민국 교회들이,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동일한 메시지다. 오로지 의심치 말라에 힘을 싣는다. 의심하는 믿음은 나쁜 것이란 단순 결과가 나오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신은 결코 의심하는 인간들을 증오하거나 벌주지 않는다. 의심하는 마음을 감싸고 어루만지며, 신의 연민을 보여준다. 한량없이. 그것이 신의 사랑이다. 주인공이 말하는 건 바로 이 신의 '연민'이다. 권력욕에 찌들어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자들은 경계와 경계를 넘어 인간을 껴안는 연민을 잊기 쉽다.
영화는 9.11 이후에 종교적 갈등과 불관용에 대해, 한 인간의 시선을 통해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준다. "내 이름은 칸입니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란 말엔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 각 종교에는 극단적 계파들이 존재한다. 청년 예수가 활동하던 시절에도, 천국을 현실에 이식시키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힌 열심당이 있었다. 이슬람 내에도 온건한 입장과 강경파가 갈리고 불교라고 다를 바 없다. 종교 내부에서 '자신의 소신을 관철하려는' 세력은 어디에든 있다. 문제는 이들이 '나만 옳고 타인은 틀리다'란 관점을 재생산하며 일절 신의 연민에 눈을 감는 다는 점이다.
난 극중 주인공이 참 부러웠다. 그가 168의 IQ의 소지자여서, 혹은 한 여자의 웃음소리에만 심장이 뛰는 로맨티스트여서가 아니다. 그에겐 이상하리 만치 돕는 손길이 많다. 힌두교도인 여자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동생의 곁에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연구하는 심리학자인 제수씨가 있었고, 진보적인 기자였던 마크와 그의 아내 새라, 아들 샘과 둘도 없는 친구인 리스가 있었다. 대통령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 그에게 자전거 사고를 계기로 만나게 된 흑인 조엘과 그의 어머니 제니. 주인공은 제니를 정말 '맘'이라고 부른다. 주인공은 되뇌인다.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맺어지는 것"이라고. 종교(Religion)의 의미는 라틴어 Religiore에서 나온 것이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그 위의 인간과 인간을 엮는 힘. 이것이다. 그 관계의 시작과 유지를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은 자신의 신념만이 옳다는 광기가 아니라, 죄된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껴안은 신의 '연민'이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개별 씬마다 보석처럼 박아넣었다.
그리고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요즘 개신교 신자들을 세상은 '개독'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이 땅의 개신교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 보다, 자신만의 소신을 강하게 드러내며 타자들을 압박하고, 이를 위해 정치적 권력을 탐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욕망에 질린 일반 대중들의 증오가 도를 넘어갈 정도다. 솔직히 그들의 분노를 이해하기에, 뭐라 딱히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도 없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증오심을 '집단 전체'에 광적으로 투사하는 일이다. 이것은 내부의 선한 세력까지 질식사 시킬 수 있기때문에 도움이 안된다. 마치 주인공의 종교인 무슬림 전체를 9.11 이후, 철저한 증오의 렌즈로 바라본 것과 다를바가 없다. 현실이 혼탁할수록 본질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씩 가야한다.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끝도없는 여행을 시작한 주인공처럼, 언젠가는 '극복'하게 될 것을 믿으며 '신의 시선' 내부로 깊숙히 들어가야 한다. 조지아주를 강타한 허리케인의 와중에도, 엄마 제니를 찾아가는 착한 남자 주인공의 모습. 관용과 연민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정치가들이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열을 올리는 동안, 정작 국내의 상처를 극복하고 화합했던 건, 한 남자의 노력에 감격한 또 다른 인간들의 따스한 연대였을 뿐이다.
나도 주인공처럼 외치고 싶다. "내 이름은 김홍기입니다. 저는 개독이 아닌 기독교도입니다"라고. 나를 둘러싼 종교적 환경은 결코 좋지 않지만, 언젠가는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람하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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