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적 세계의 답답함을 넘어서
하늘의 별이 보이는 것은 어둠이란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별'이란 단어에 부여하는 희망이나 믿음이 담즙같이 어두운 세계의 쓸쓸함을 배경으로 잉태된다는 말이다. 현실이 힘들고 버겁더라도 그 어둠이 있어야만 너의 진가가 드러날 것이니 두려워 말라고. 삶이 너무 화려하고 밝은 이들에게, 오히려 그 별이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내가 별을 볼 때마다 자신에게 되뇌이는 말이다.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부른다. 나이 마흔이 되면서 거울을 볼 때마다 가장 화나는 게 예전 검정색 동공을 둘러싸고 있던 흰자위의 표면에 실핏줄이 서고, 혼탁해지는 걸 발견할 때다. 예전에 눈이 참 맑다는 이야길 자주 들었는데, 어느샌가 눈동자가 눈까리로 변질되어 가는 내 신체의 일부가 미워진다. 어디 나 만의 문제겠는가? 심한 근시를 앓는 오른쪽 눈과 비대칭으로 서 있는 왼쪽 눈. 안경을 벗으면 사물이 이중으로 보이고, 여기서 이중의 잣대가 태어나 나 자신의 판단기준을 흐리기 때문일게다. 눈을 뜨고 있으나 가시적 세계를 왜곡된 상으로 바라보는 내 자신을 보니, 시각장애인보다 나을게 하나도 없다.
줄리아의 눈, 서스펜스의 새로운 문법을 쓰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를 지금도 찾아보며 혀를 차는 나로서는, 모처럼 만에 스릴러의 명작을 만났다. 바로 <줄리아의 눈>이다. 우리는 흔히 서스펜스란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서스펜스란 사람을 대롱대롱 잡아놓는 기술이다. 잡힌 이상 움직일 수 없고, 포착자의 힘에 의해서 움직여야 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잡힌 이들이 자신이 잡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그 사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18세기 낭만주의 시인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는 이런 예술의 힘을 '불신의 의지적 보류(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라고 불렀다. 오랜만에 내 자신의 의지로 불신을 보류하고 싶을 만큼, 이음새없는 플롯을 가진 영화를 만났다. 줄리아의 눈은 공포와 스릴러의 세계를 오가면서도, 시각적 세계에 대한 철학적 단상을 놓치지 않는다. 분명 공포물인데, 스릴러와 결합된 세상에 관한 논평은 가슴 한 구석에 묻힌, '우리자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면모를 선연하게 돋을새김한다. 이 정도의 메시지를 배합하고 이를 힘있게 끌어가기란 보통 어렵지 않다. 영화 <줄리아의 눈>은 매우 밀도가 높은 영화다. 오랜만에 꽉찬 느낌이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들........
선천적 시력장애를 가진 주인공의 사투는 칠흑같이 어두운 배경을 바탕 속에서 피어난다. 자살로 포장된 언니의 죽음, 그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의문의 죽음들이 발생하고, 정상시력을 가진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둠의 그림자가 끊임없이 나타난다. 이 영화는 스릴러와 범죄, 공포물의 문법들을 혼합했지만, 각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커지는 프랙탈적 세계를 구현한다. 흔히 말하는 뻔한 스릴러와 범죄 이야기가 아니란 거다.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실제 시력을 상실해가는 주인공의 상황은 가시적 세계에 대한 불신과 더불어, 기존의 시각 체계가 가진 맹점을 하나씩 드러낸다. 인간의 눈이 모든 것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한다는 것. 무엇보다 시각이란 것도 결국은 우리 자신의 의지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어서, 보이지만, 보지못한 것처럼 취급하는 사물이나 사람이 있을 수 있음에 대해 반성케 한다. 영화는 타자화된, 혹은 세상에서 지워진 이들이 세상을 향해 던질 수 있는 참혹한 복수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이 영화의 메세지는 사뭇 육중하다. 진실과 허구는 마치 접안렌즈처럼 언제든 떼어낼 수 있다는 점일 거다. 암흑을 다루는 영화답게, 영화의 전개과정에서 '오프 스크린'이 자주 등장한다. 그냥 검정색 화면에 배우들의 목소리만 들리는 것이다. 더 무섭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드러나지 않기에 더욱 날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오는 배우들의 언어가 내 가슴팍을 쳤다.
난 스페인을 참 좋아한다. 고야도 좋고, 스페인의 패션도 좋아한다. 같은 유럽이지만 이탈리아나 영국, 프랑스와도 또 다른 정서가 깊이 베어있기 때문인데, 이번 영화도 그런 문화적 섬세함의 차이를 영상에 덧입힌 통에,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두 눈을 감싸면서도, 힐끗힐끗 영화의 호흡을 쫒아가며 따라가느라 애를 먹었다. 이 영화의 장점은 영상처리와 더불어 공포감을 자아내는 '청각효과'가 주목할만하다. 그저 청각이란 게 여주인공의 찟어질듯한 비명소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물이 끓는 주전자 소리, 평범한 전화기 벨 소리에 간담이 서늘해 보긴 이번이 처음이다. Ambient Sound, 주변음을 갖고 이렇게 마음을 휘젓는 연출력이 부러울 뿐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 이어 눈을 소재로, 공포의 감정과 눈의 존재론에 대해 이렇게 서스펜스를 이용해 관객들을 사로잡는 영화는 처음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
좋은 영화는 사람의 시각을 바꾼다. 단순히 어둠 속에서 공포와 전율만을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는 비추다. 이 영화에 도덕주의 영화란 딱지를 붙이고 싶다. 그래......내 눈을 스쳐가는 작은 것들을 소홀히 하지 말자란 믿음을 키워본다. 행여 보았으나, 보지 말았으면 좋았을걸......끌끌 혀를 차며 모른 척 엉거주춤 넘어간 세상이 있었다면 그들에게 미안하다. 다시는 세상이 그대를 홀로 둔다고, 나 또한 그 세상에 편승해, 존재하는 것들을 스스로 배제하고 지웠다면 반성할 일이다. 나도 모르게 지우고 싶었던 것들을 대면하고 싶어졌다. 이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한번 손에 잡은 책이 있다. 좀 맥락과는 상관이 없어보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흑인작가 랠프 엘리슨의 <보이지 않는 인간>이란 소설이다. 재즈 연주자이자, 프리랜서 흑인 작가였던 엘리슨은 『보이지 않는 인간』을 통해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는다. 프롤로그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 이유가 인종차별적 사회에서 백인들은 심지어 흑인들조차도 자기들의 모습이나 자기들이 머릿속으로 지어낸 이미지로만 흑인들을 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스스로 머릿속으로 지어낸 이미지의 우상 앞에 절하기 때문이다. 이런 우상을 마음속에 세워놓고 살아가는 한, 내 안의 별은, 타자의 가슴 속에 파묻혀 있는 별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이때 지워진 자는 세상을 향해 복수의 칼을 갈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심하자. 나는 멋진 눈을 갖고 싶다.......동공 속에 우주를 담아낼 수 있는 그런 눈동자를 갖고 싶다.
절대로 안될거라고? 칫......그래 말 나온 김에 시력검사라도 받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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