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런웨이를 읽는 시간

너희가 디테일을 아느냐-2011 루비나 패션쇼 리뷰

패션 큐레이터 2011. 4. 15. 23:24

 

2011 F/W SFAA 패션쇼 이틀째 디자이너 루비나 선생님의 쇼에 다녀왔습니다. 이상봉 선생님 옆자리에 앉아서 디자이너가 디자이너에 대해 평가하는 언급도 들어볼 수 있어서 제겐 좋은 기회였습니다. 저는 이상하리만치 진태옥, 이영희, 이상봉, 루비나, 박항치, 설윤형 등 이 세대의 디자이너 선생님들을 참 좋아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6 학년 때, 그저 한글 밖엔 모르는 제게 영향을 미친 패션 잡지가 있습니다.

 

월간 <멋>이라는 잡지였어요. 그 시절 한창 패션쇼 사진들을 보면 너무 멋져서 항상 뚫어지게 읽고 또 읽고 패션 용어들을 잘 몰라서 중학교 1학년 시절, 지방의 대형서점칸에 기적적으로 꽂혀있는 도렌 야우드의 <복식사 & 용어사전>을 사서 찾아 읽으며 공부하던 때였네요. 이때 잡지를 펼치면 줄곧 국내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소개되는데, 앞에서 언급한 세대의 디자이너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중학교 1학년때였나, 지난번 글에 썼던 신장경 선생님이 신인 디자이너로 상 받은 소식을 접하던 때 였습니다. 세월이 흘렀지요.  

 

SFAA가 1세대와 1.5 세대 디자이너들의 교류의 장으로서 이들의 성과를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꼭 패션 뿐만 아니라, 어느 산업이든,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조차 세대론적으로 갈릴 때가 많습니다. 마스터 그룹은 나름 기득권과 인지도를 가져서 존경을 받고 신인 그룹은 신인이라 참신함으로 주목 받는데 중간에 낀 세대들은 제대로 된 대접을 못받는다고 한탄하는 분들이 꽤 계시더군요. 이건 패션계만의 문제는 아닐겁니다. 미술계도 그러니까요.

 

결국 뒤집어보면 이런 현상의 배후에 영향을 미치는 언론의 잘못도 있고요. 이들이 항상 창의적 사유를 하는 집단을 세대론적으로, 나이별로 양극화시켰다는 점입니다. 창의성이란게 어디 나이로 규정되던 것인가요? 장 폴 고티에는 지금도 여전히 대담합니다. 비비엔 웨스트우드 아줌마도 대단하고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 나이란 렌즈를 들이대서 사람을 잘 평가하는 버릇이 있죠. 그렇게 언론이 띠우고 죽이고를 반복하며 사라져간 신인 디자이너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요즘 마무리를 향해 달리고 있는 역서, <패션 디자이너 서바이벌 가이드>에서 미국 패션 협회 회장인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가 '아무리 기술의 발전을 외쳐도 패션은 여전히 도제식의 역사를 갖는다'고 말하더군요. 도제란 것이 결국 장인 밑에서 오랜 세월 숙련을 거쳐 자신만의 색을 찾고 이후에야 독립을 하는 것이죠. 문제는 독립을 해도 여전히 코치가 필요하고 멘토링이 필요하더란 겁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의 패션 디자이너 1세대와 1.5 세대 분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부지원 하나 없이 자비로 해외에 나가서 도전하고 시행착오 겪어내면서 어찌되었든 버텨냈기에 지금, 우리가 있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이 세대 분들의 도록이나 작품집, 혹은 앤솔로지를 만들어서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그 작업을 위해 매일 글을 쓰는 것이고요. 우리나라는 유독 지나간 세대, 흘러갔지만 바탕이 되었던 사람들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장인이란 직종이 끊어지는 문화가 된 것 바로 이런 이유지요.

 

 

말이 좀 길었습니다. 이틀 째 찾아간 SFAA 쇼에서 만난 디자이너 루비나의 작품들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디자이너의 인스퍼레이션 노트를 봤더니 '지나간 것들을 새롭게 보는 것' 즉 레트로 경향을 고전적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고 되어 있군요.

 

 

이상봉 선생님 조차도 그날 같이 서울대 특강이 있어서 차를 타고 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데 그러시더군요. '옷의 완성도와 촘촘하게 차오르는 디테일의 힘에 있어서는 국내 최고의 디자이너'라고 칭찬하시더군요.

 

 

심지어는 '그 여자는 옷에 미친 사람'이라고 하시는 거에요. 되집어 보면 이 보다 더 큰 찬사가 있나 싶습니다. 사실 저 조차 살아가면서 제일 듣고 싶은 말이 '어떤 분야에 정말 미친 사람'이란 평가거든요. 이렇게 한 사물, 혹은 개념에, 옷에 미치지 않으면 아이디어는 발광(發光)하지 않습니다. 발광을 해야 발광이 되는 거라고요.

 

 

 개인적으로 끌린 옷이네요. 울과 리버시블 울, 레더, 실크, 타프타 알파카, 벨벳, 이중직 니트등 다양한 소재로 선보인 가을/겨울 컬렉션은 의고적인 향취를 가미한 단정함이, 깔끔한 디테일의 처리와 함께 소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렌지와 벽돌색, 베이지와 카키, 자두빛 도는 분홍과 겨자빛깔이 감도는 회색 등 다양한 색의 변주도 현란하기 보다, 철저하게 디자이너의 시선 아래 통제되어 있어서 매우 안정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항상 기대한만큼 멋진 패션쇼를 보여주신 스파 멤버분들께 고마움을 표하고 싶고요. 무엇보다 1세대, 1.5세대, 2세대, 3세대 등, 세대를 흘러가면서 잊혀지지 않도록 지나온 디자이너들의 삶과 작품을 조명하고 이들을 책으로 묶어내는 작업을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요즘은 이 각오 하나로 버티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