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필로소피아

여자는 왜 호피무늬를 좋아할까-모피의 심리학

패션 큐레이터 2011. 1. 25. 09:00
 
홍세연_얼룩무늬_캔버스에 유채_130.3×193.9cm_2010

최근 고양이 모피 때문에 한창 인터넷이 난리였다. 무슨소리냐고?

국내 최대 SPA 브랜드에서 '고양이 모피' 조끼를 판매했다는 사실이 한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인터넷 공간은 동물보호론자와 제조업체 간의 한판 힘겨루기가 이뤄졌고, 결국

해당 업체는 전체 물량을 다시 반품시키고 소비자들에게 사과를 하는 선에서 이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고양이 모피가 화두가 되었던 건 무엇보다 업체에서 자칭 중국산

와일드 캣이라 불렀던 것이 결국 '들고양이'들을 처참하게 죽여 처리한

모피였다는 점 때문일거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궁금했다.

 
홍세연_정원_캔버스에 유채_145.5×112.1cm_2010

왜 여자들은 모피에 이상하리 만치 끌리는 걸까?

패션의 사회심리학적인 요소를 일일이 들어가며 설명하기엔

지면이 좁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을 건드린 현대 한국

작가의 그림을 고르는 것인데, 바로 홍세연의 <정원>연작이다. 소파 위의 표범이

그림을 바라보는 관람객들을 바라본다. 그것도 아주 날카로운 눈빛이다. 초원을 호령하며

예의 뛰어난 운동신경을 자랑해야 할 표범의 표정치곤 약간 슬퍼보이는 눈빛이다. 왜 일까? 작가는

표범의 표정에서 자신의 자화상을 보았다고 했다. 야생성을 상실한 채, 누워있는 표범은

눈빛만 살아있다. 그림 속에서 소파는 단순하게 인간을 안락하고 편안하게 쉴수

있도록 돕는 기제가 아니다. 소파의 무늬와 표범의 무늬가 같은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중세 말부터 시작된 인간의

모피 홀릭, 혹은 모피 의상의 시작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홍세연_숲_캔버스에 유채_97×162cm_2010

여자들은 다양한 동물의 모피를 걸친다. 예전 중세때는 하얀색 담비가 최고의

물건이었고, 왕들은 이 에르민이라 불린 담비털을 자신과 최고위층 종교 지도자들만을 위해

남겨 두느라, <사치금지령>이란 법도 제정을 해야했다. 모피는 세월을 통해 일종의 문화적 의미를

얻어냈다. 인간의 몸을 보온하고 따스하게 안아주는 소재에서, 당시만 해도 구득이 워낙 어렵다보니 희귀하고

최고가의 상품이라, 돈이 많은 신흥 부르주아 층들과 귀족들만이 이 소재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만큼 돋보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이 보다 잘 구현해주는 소재가 없었던 셈이다.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있다. 모피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끈 데는 무엇보다

도시란 공간이 만들어진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세의 협소한 촌락/영주 문화에서

벗어나 중세 말에 이르면 교역의 발전에 따른 도시국가가 형성된다. 이탈리아가 그 시작이다.

툭하면 르네상스를 가리켜 '인간의 재발견'이란 표찰을 붙이는데, 이건 매우 추상적인 갈무리다. 르네상스

란 시기에 드러나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반드시 살펴야 한다. 자본주의 개념이 잉태하던 시절이고

기존 사회를 지탱하던 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무너지는 세계에서 옷이란 걸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새롭게 생성한 부'를 자랑함으로써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기를 바랬다. 그 꿈을 실현시킨 것이 바로 모피다.

홍세연_숲_캔버스에 유채_97×162cm_2010

예전 모피의 역사와 관련된 패션 전시를 한번 본적이 있다.

뱀가죽, 악어가죽, 고양이 가죽(안타깝게도 중세때도 이미 고양이 가죽으로

옷을 지어입었다) 담비, 족제비, 호피 등 인간은 다양한 동물의 외피를 덮으며 익명성이

생기기 시작한 도시 공간 속에서 '타인을 향해 자신을 알리는 첫 세대'를 시작한다. 르네상스는

급변하는 사회였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사회적 개인'이란 개념을 받아들인다. 즉 사회에서 스스로 자리를

확보해가야 하는 인간을 말한다. 세속적인 성공의 관건은 얼마나 사회적 적용력이 있는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때 상대방의 위치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인덱스, 표상은

뚜렷이 정립되지 않았다. 이때  '옷'이 구별을 위한 도구로 등장한다.

 

 

홍세연_숲_캔버스에 유채_97×162cm_2010

홍세연의 작품은 바로 이런 점에 착안한다. 호피무늬 소파는

아프리카를 갈망하는 여인들의 마음을 담는다. 여자들은 명품 브랜드의 백을

들거나 혹은 입을 때, 독특한 디자인의 상품을 입을 때, 희소가치만큼의 자신감을 얻게 되며

사회 내의 자신의 위치가 올라가고 있다는 환상에 빠진다. 홍세연 작가는 이런 메시지를 살짝 비튼다.

여자들의 외출을 하면서 명품 브랜드의 호피무늬를 걸치는 걸 좋아하는 건 호피 무늬 속에

담긴 '동물들이 자연스런 질서 속에서 살았던 편안한 낙원'의 세계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하긴 그럴듯한 해석이다.

 
홍세연_얼룩무늬_캔버스에 유채_130.3×193.9cm_2010

홍세연에게 호피무늬는 많은 의미를 담는다. 우리들은 흔히 생활 속에서

자칭 '지상낙원'이라 불리는 아파트 광고들을 본다. 대중 매체 속의 광고에는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낙원의 이미지가 그대로 투사된다. 널브러진 산책로와 시냇물이 흐르고

작은 동산과 잘가꾸어진 조경 속 숲의 이미지까지, 자본은 이 모든 걸 가능하도록 만드는 힘이다. 여자들이

아파트를 희구하는 건, 신이 제작한 정원보다 이곳이 더 편리하게 설계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 이 정원이 실제로는 남성적 시선으로 만들어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을 건낸다.

그만큼 편한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에 갖혀사는 또 다른 우리들의

모습을 보자고 작가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홍세연_정원_캔버스에 유채_145.5×112.1cm_2010

도시란 세련된 공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야생성을 거세한 채, 관람객들의 즐거움을 위해 살아야 하는

동물의 모습 속에서, 아니 동물들이 입고 있는 외피와 무늬에서 실제로는

갖혀 살아가는 여자들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유리 동물원의 관람용으로 말이다.

타인의 눈을 생각하고 그것에 내 욕망을 맞추며 사는 이들을 생각해보라. 내가 입고 싶은 대로 입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 '매력적인 코드로 입어야 하는 세상. 그 속에서 동물을 희생시켜

 만들어진 모피를 입는 건 나 또한 그 희생 제사의 또 다른 '제공물'임을

선포하는 것과 다름아니다. 그러니 여성들이여, 올해는 모피를

벗어두자. 내 안에 있는 싱싱한 야생성, 여성의

용기를 살려내보자......

 

 

들고양이를 모델로 글 쓰시는 블로거분들이 참 고맙다

얼마나 모피에 대한 수요가 많으면 농장에서 키워내는 모피로 수요를

버티지 못해 길 고양이/ 들고양이를 잡아 모피제품으로 만드는 것인지, 난 환경론자도

아니고 동물보호론자도 아니지만, 이렇게 까지 하면서 굳이 입어야 하는지는 정말이 모르겠다.

그래도 올 벽두를 장식한 지방시의 봄 신상품 레오파드 무늬 스니커즈는 참 갖고 싶다.

러블리 러블리....(요즘 애교가 늘고있다) 나 왜이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