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필로소피아

내가 명품을 사랑하는 이유는

패션 큐레이터 2011. 1. 26. 07:00

 

혹독한 한기가 가득한 요즘, 강남대로를 가로질러 부산하게 걸었다.

2011년 펜디 브랜드의 봄/여름 신상품 소개가 있는 날이었다. 펜디 브랜드와는

2년전 국내 유수의 아티스트들과 함께 진행한 바게트 프로젝트 이후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살펴보고 있다. 개인적으로 라거펠트가 이적한 이후의 펜디 브랜드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예전 패션 바이어로 활동할 때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열심히

상품 하나하나를 꼼꼼히 보지 않았다. 좋은 브랜드를 유치하는게 일차 목적이지

개별 상품이 왜 명품인지, 브랜드의 가치를 유지하는 디자인의 핵심이

무엇인지 살펴보지 않았다. 항상 시장내의 경합 상태가

중심이고, 매출 과제가 의사결정의 핵이었다.

 

 

오랜만에 트렁크 쇼를 갔다. 트렁크 쇼란 건 원래 백화점이나

고급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소수의 고객을 상대로 신상품을 선보이는 쇼를

말하는데, 오늘 쇼는 언론사의 패션 저널리스트들을 위해 준비한 트렁크 쇼 정도라고

보면 된다. 일반 런웨이쇼에 가면 너무 부산하고 일단 어둡고,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도

디테일이 잘 안보여서(노안인가?) 언제부터인가 꺼려했다. 오늘은 가까운 거리에서 한땀한땀, 동공을 굴려가며

전체 착장 상태와 색상, 디테일, 실루엣 이런 것들을 다 눈에 소화시킬 수 있어서 좋았다. 패션 블로그로

이 정도 여유를 얻을 수 있는 것 조차도 감사한데, 참 얻는게 많다.  누릴 수 있을 때 누리는 것도

좋은 것이다. 단, 내겐 두 개의 눈이 있어서 마냥 칭찬만 늘어놓지는 않는다.

 

 

펜디의 2011년 S/S 컬렉션의 테마는

'타오르는 열정의 여름'이다. 이 정조를 표현하기 위해

쿠튀르의 마법사 칼 라거펠트가 천착한 것은 '이원적인 것들'에 대한

연구다. 거창한 말로 듀얼리즘. 우리의 삶은 항상 이항대립으로 구성되어 있다.

빛과 어둠, 부와 가난, 선과 악처럼 말이다. 칼 라거펠트가 선보인 펜디의 이번 컬렉션은

구조적인 면과 가벼운 느낌을 섞는다. 물처럼 유동적인 선과 동시에 기하학적인 요소를 혼합시킨다.

나로서는 펜디의 매력은 역시 벨트의 힘이 아닐까 싶다. 오늘 소개하는 옷의 중심을

잡아주는 힘의 근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살펴보라.

 

 

 

중세 말기에 등장한 코트아르디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풍성한 소매의 선을 보라. 그러나 선의 흐름이 방종하게 흐르지 않게

잡아주는 요소가 있다. 뭘까? 바로 깔끔하게 갈무리된 도트의 질서감이다.

이 도트도 그냥 찍은게 아니다. 판화에서 사용하는 러버 스탬프란 기법을 사용해 만든 것이다.

   

 

노랑색 꽃 잎파리가 너울거리는 여인의 옷에선 이미 봄 기운이 가득하다.

여기에 미우미우의 통굽 이후로 완전히 내 눈을 마비시킨, 단아한 구두의 형상도 곱다.

 

 

보라와 갈색, 파랑과 주황, 4가지 색상이 인접되어 있으나

서로를 튕겨내지 않고 절묘한 색의 조화를 이룬다. 비단 펜디만의

장점도 아닐거다. 명품 브랜드를 볼 때마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요소들이 있다.

그건 박음질과 같은 장인정신, 아마 요즘엔 '한땀한땀'이란 수사로 인기몰이를 하는 그 정신에

두번째로 튀지않으면서 시대의 정조를 표현하는 색의 팔레트다. 색을 선정하고 섞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은 색을 창조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더욱 공고히한다. 존 갈리아노의 휘발성

넘치는 색상, 툭하면 고동색 하나로 세상의 모든 색을 표현하는 장 폴 골티에, 생동감 넘치는

젊음과 저항의 기치를 표현하는 마크 제이콥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색으로 말한다.

 

비가시적인 작은 차이들이 명품을 만든다. 장인의식과

혁신적인 사고, 무엇보다 품질을 위해 디테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 명품을 만든다. 인정할 건 해야한다.

 

단......우리는 이런 명품의 꿈을 이룰 수 없는 걸까?

서양패션의 역사에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브랜드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 후반이다. 그만큼 긴 역사를 갖고 있으니, 장인들의

기술 또한 전수되며 축적되는 정도가 깊었을 터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에겐

그럼 '한땀한땀 한국의 장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술이 없냐고 말이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우리도 있다. 문제는 정부의 관리소홀과 비효율적인 육성정책 때문에 장인들이 죽어간다.

우리가 가진 공예기술을 접목시키기 위해 현대 패션 기업들과 연계짓는 작업도

한때 좀 하는가 싶더니 심드렁해졌다. 맨날 단타치기 작업만 하니

무슨 장기적인 안목에서 패션 브랜드를 만들수 있겠나?

 

 

여인의 구두를 볼 때, 사람들은 힐의 높이를 본다.

난 좀 다르다. 여자의 구두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발을 감싸는

전체적인 구조의 아름다움이다. 발의 곡선을 유연하게 따라가며 돌올하게

융기된 동맥선을 살포시 덮는 저 스트랩의 매력. 구두의 스트랩은 단순한 잠금장치가

아니라, 여인의 갇힌 섹슈얼리티를 잠구고 언제든 열릴 준비가 되도록 '장착'시키는 마법의 주문이다.

여자를 갖고 싶다는 욕망도 바로 '언제든 살포시 벗길 수 있는' 저 스트랩에서 나온다.

하나같이 여자들의 소품이, 성적 욕망과 연결되는 프로이드적 상상력은

사실 이런 요소들에서 발산되는 것들이다.

 

이것이 여인이 힐을 신는 이유다.......기억하라

 

 

단정하면서도 튀지않는 색감의 백들이 눈길을 끈다.

코발트 블루, 한 여름의 하늘빛을 담은 여인의 백이 눈에 들어온다.

 

 

 셀러리아 백은 펜디의 얼굴이다.

이탈리아 장인들이 한땀한땀.....정성들여 만드는 공정을

예전 도록을 통해 본적이 있다. 가죽을 다루는 기술은 쉽게 전수되지 않으며

완성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명품이란 것의 가치를 함부로

'소비주의 조장'이란 수사로 폄하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위에 보시는 가방은 실바나 백이라 불린다. 실바나가 누구냐면 '

실바나 망가노라고 70년대 이탈리아 영화계를 주름잡던 여배우였다. 요즘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섹시함의 종결자(?)'정도 되지 싶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에서

그녀가 보여준 고혹적인 매력, 실바나 백은 바로 그녀의 매혹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백이다. 색이

튀지 않는 이유는 항상 중간색을 쓰면서 고전적인 느낌을 유지하기 때문인데, 이 백의 진짜 매력은 바로 이질적인

소재가 하나로 뭉치는 방식이다. 악어가죽과 곱게 무두질된 꾸오이오가죽, 그리고 캔버스천, 이 세가지가

힘든 표정을 짓기보다 단아하게 하나로 통합된 것. 바로 실바나 백의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이질적인 것을 껴안는 것은 바느질의 힘이다. 정결함이 넘치는 한땀 한땀을 보라.

올 S/S 피커부 백

 

펜디가 내놓는 핸드백마다 항상 눈길이 간다. 많은 사람들은 펜디의 피커부(Peek A Boo)

백에 눈을 돌린다. 피커부란 이탈리어로 ‘까꿍, 놀랬지’를 뜻한다. 가방 안에 또 다른 가방이 들어있는 것 같은

트롱푀이유 기법(눈속임을 위한 회화기법이란 뜻)이 특징이다. 하지만 나는 빈티지 느낌이 나는 펜디 실바나 백에 더욱

애착을 느낀다. 옷에 대해서는 샤넬을 추종하지만, 백에 대해서 만큼은 펜디에 애정을 갖는 이유는 트랜드를

따르기 보다 클래식한  디자인을 고수하면서 제품 자체를 견고하게 만드는 태도 때문이다.

 

 

저 견고한 스트랩......백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방점이다.

 

요즘들어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참 내가 봐도 예전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이냐고? 예전엔 패션쇼에 초대받아 가면 그곳에 온 명사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영화 배우 누가 왔다더라, 같이 사진찍고 파티에 참석하고 뭐 그랬다. 시간이 흘러, 블로그를 통해

패션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시간, 내 안의 열정은 다른 방식을 향해 간다. 아직도 젊은 아가씨

들이 운영하는 패션 블로그를 가보면 다들 명사와 셀리브리티 이야기로 넘쳐난다.

툭하면 인터넷에 공항패션을 운운하고, 누가 맨 핸드백이 어떻고 하는

식이다. 확실히 나이가 들었는지 이런 기사에 영 심드렁해진다.

 

단 런웨이를 가건, 이런 트렁크 쇼를 가건, 예쁜 모델보다

아니 그녀의 아름다운 다리선보다, 제품이 먼저 보인다. 그리고 고민한다.

디자이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뭘 말하고 싶었고, 이를 위해 어떤 것들을 차용했을까

뭐 이런 생각들이다. 젊은 아가씨들과 패셔니스타들에겐 고루해보일지 몰라도

나는 이런 시선의 변화가, 태도의 변화가 참 좋다.......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진짜 패션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무엇보다 옷을 만드는 이들과 그것을 입고 하루의 일상을

행복하게 사는 모든 이들을, 옷이란 언어를 통해 따스하게 안아낼 수 있을것 같다고.....

 

그래서 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