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 나갔습니다. 너무나 명멸하는 짧은 시간의 가을, 이 시간성을 만끽하기가 쉽지 않네요. 우연하게 들어간 전시장에서 '색을입다'란 이름의 개인전을 봤습니다. 섬유디자인을 전공한 작가인데요. 현재는 일본의 무사시노 미술대학의 연구원으로 있다고 합니다. 제가 기모노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 복식사 관련 책들을 자주 모으고 있는데요. 그 중에서 헤이안 시대의 기모노는 가장 미려하고 우아한 색감을 가진 텍스타일이 중심이 됩니다.
염색을 전공한 작가답게, 일본 헤이안 시대의 색감을 배우고 이를 통해 패션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기 위해 이번 전시를 열었답니다. 헤이안시대(794-1185)는 일본의 고유한 색채미가 발전한 시기였습니다. 이 당시 중국대륙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염색기술과 안료개발 등으로 색에 대한 '고유화' 시대를 열었죠. 말 그대로 자국의 풍토와 문화를 이식한 일본 고유의 성격을 가진 외국문화의 유연한 섭취가 만들어낸 다양한 색의 감성과 복식문화가 꽃 피우게 된 시기였습니다. 의복에 있어서도 외국 복식의 자기수용 경향이 강해지면서 의상의 디테일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사계절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겹쳐입는, 이른바 레이어드 스타일이 등장하는 시기였습니다. 헤이안 귀족들은 넉넉하고 우아한 양식을 몸에 입기 위해 '가사네우치기'라고 하는 몇 겹씩 겹쳐입는 복장을 했다고 하죠.
그리스 패션을 봐도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키톤이란 불리는 기본 의상 위에 클라미스나 히마티온이란 망토를 겹쳐 입어서 자연스레 주름이 만들어내는 물성을 이용하곤 했죠. 서양은 드레이프를 통해 주름을 만들고 이로서 우아함을 표현했지만, 일본 헤이안 시대의 의상들은 레이어드, 겹쳐입음을 통해 우아함을 드러냅니다. 단 이 때 목 언저리나 소맷부리 등에 나타나는 배색을 중요시 했습니다. 어찌보면 더욱 정교하고 미세하게 인간의 시지각을 자극하는 그들만의 '복식의 에로티시즘'을 만들었다고 봐야 하겠죠. 의복의 겉감에서 안감의 색이 비쳐 보이는 배색을 하여 자연과의 조화와 계절의 감각을 드러내곤 했는데요 이렇게 옷에 사용된 색의 조합을 가사네 색조라고 부릅니다. 이번 김민정 작가의 작업은 이 가사네 색조를 현대적으로 변모시키려는 노력입니다.
헤이안 시대의 복식은 겉옷의 안에 몇 단이고 겹쳐입음으로써 겹쳐입은 옷의 솔기부분에 나타나는 색의 조합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가사네란 것이 두 가지 색이 겹쳐지며 통합된 색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보니, 핝방의 직물로서 표현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고 하죠. 전시장에 들어갔을 때도 옷의 형태보다는 마치 대기를 부유하는 듯한, 가벼움과 미려한 색감이 어우러져있는 선적인 세계랄까, 이런 느낌이 강하게 들더군요.
텍스타일과 염색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자료를 만들고 전시를 해볼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옷'의 세계란 단순하게 재단과 봉재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죠. 결국 되돌아보면 옷을 만드는 직물의 체계에서, 직물이 덧입는 색감의 세계, 그것을 창조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재검토하고 살펴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정식 전시라고 하기엔 사실 미약한 부분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힘들게 염색 작업한 직물에 형태를 부여하고 더욱 섬세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이나 전시장의 분위기와 다소 어긋나 있는 듯한 디스플레이도 눈에 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고유염색과 색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우리의 것으로 변모시키려는 노력을 할때, 결국 패션의 색감과 언어는 더욱 풍성해지지 않을까요? 레이어드가 단순하게 형태상의 풍성함과 세련미가 아닌 색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는 점, 오늘 이 전시를 통해 헤이안 시대의 복식이 가르쳐주는 작은 가르침 하나 가슴속에 심어보네요.
사진 자료 및 자료제공 : 김민정 (본 글의 퍼갈 시 저작권에 위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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