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컬렉터의 마지막 럭셔리
숙명여대 정영양 자수 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자수 명인이자 패션 컬렉터인 정영양 박사님을 뵙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강인한 눈빛과 단아함 품새가 움직임 하나하나에 배어있는 분을 만나 조심스러웠습니다. 2005년 개원한 정영양 자수 박물관은 대학에 설치된 패션 박물관입니다. 이 박물관 설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신 분이 정영양 관장님인데요. 평생 수집하신 동아시아를 비롯 세계의 다양한 전통 자수 작품들을 기증, 오늘날의 특성화된 박물관으로 만드셨습니다. 저는 복식을 좋아하다 보니 세계의 패션 박물관과 갤러리, 뮤지엄들을 자주 다녔습니다. 구두를 좋아해서 캐나다의 베타슈즈 뮤지엄이나 모나코 구두 박물관을 다녔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패션 섹션은 제 단골 무대였습니다. 어디 이뿐인가요 로스엔젤레스 카운티 뮤지엄이나 브룩클린까지 미국의 공공 미술관들은 패션을 철저하게 특화된 컬렉션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뉴욕의 유명한 패션 디자인 스쿨인 F.I.T에도 패션 미술관이 있죠. 여기 수석 큐레이터이자 디렉터가 발레리 스틸이란 사람인데요. 저는 이분의 책을 참 좋아해서 나오면 무조건 읽고 있답니다. 서양 미술사의 주요한 작품 들과 현대패션을 병치해 설명하는 그녀의 뛰어난 글빨은 항상 저를 '쉴 수 없게' 만들죠. 이 땅의 의상학 교육은 반 세기가 넘는 역사를 가졌지만 안타깝게도 패션 뮤지엄 하나 갖고 있지 못합니다. 뮤지엄은 영감을 얻는 최고의 원천입니다. 화가 르누아르는 '나는 그림 그리는 법을 미술관에서 배웠다'고 스스로 자평하죠. 그만큼 뮤지엄은 인간에게, 지금껏 우리가 익혀온 지식들이 사실은 전승된 것들의 총체임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거인들의 어깨위에 올라탄 난장이들 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보다 더 잘 멀리 볼 수 있으나 이는 우리의 시각이 더 예민하다거나 우리의 키가 더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공중에 들어올려 그들의 거대한 키만큼 높여주기 때문이다.
자크 르 고프 <중세의 지식인들> 중에서
현대 패션이란 것도 결국은 과거의 직조 기술과 신체장식 기술이 해를 거듭하며 진화한 결과물입니다. 후학들은 거듭 발전된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실로 만든 옷'의 성을 구축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수는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인간의 정서를 표현하는 기술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당시 이화여대에 계시던 섬유예술 교수님의 프랑스 자수 전시를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 아시아 지역의 자수 또한 그 섬세함과 기예가 서구를 훨씬 능가합니다. 우리만 몰랐을 뿐이지요. 이런 자수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바꾸고자 박물관이 지어졌습니다. 그 속에는 한중일 다양한 자수 문화의 총화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습니다. 패션 큐레이터로서 패션을 수집하는 컬렉터 분을, 적어도 한국분을 뵌 건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영양 관장님은 크리스티와 소더비와 같은 세계적인 미술경매사에서 섬유미술 부문의 심사위원이시죠. 제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컬렉터의 모습을 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여전히 마음속에 19세 소녀의 모습이 있다고 하시더라구요.
왼쪽에 있는 Silken threads란 책이 바로 선생님이 쓰신 저서입니다. 중국과 한국 일본, 베트남의 자수의 역사를 집대성한 책인데요. 이외에도 여러권을 쓰셨지만 이 책은 최근에 출토된 복식과 자수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어 유용합니다. 저도 오늘에서야 알고 바로 아마존으로 신청했습니다. 아시아 텍스타일과 자수에 관한 한 최고의 석학인 분을 뵈니, 말씀하시는 거 받아적느라 정신없었습니다.
뉴욕대에서 예술교육학 박사를 하셨지만 실제 평생동안의 모든 관심은 자수를 비롯한 텍스타일 아트의 역사를 규명하고 밝히는데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뵙고 나서 드는 생각이랄까. 저도 대학 2학년 우연하게 샀던 한 편의 판화 때문에 컬렉터가 되었지만. 정말 괜찮은 컬렉터를 한 분 뵌 거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후학을 위해 박물관을 짓고 기증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사람들은 흔히 미술 컬렉터라고 하면, 그저 돈지랄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대중의 인식은 그렇습니다. 백날 컬렉터 학교에 강의나가서 '미술 컬렉팅의 역사가 유사이전 부터 시작되었고 개인이 자신의 '취향의 발전'을 기록하기 위해 시작한 행위'임을 아무리 떠들어도 듣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질문은 대부분 '어떤 그림 사면 5년 안에 그림 값이 오를까요'지요. 모 은행의 VIP를 위한 컬렉팅 강의에 나갔다가 들었던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컬렉터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믿는 사람입니다. 일제시대, 간송 전형필 선생님이 없었다면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패션을 컬렉팅 한다는 것은 시대의 미적 이상, 특히 인간의 신체장식을 둘러싼 열망, 경제와 문화 전체를 포괄하는 담론을 공부하는 일입니다. 최근 복식연구들은 경제학자나 인류학자들의 연구로 돌아선지 오래여서, 중세의 기술교역이나 테크닉의 발전 수준을 '직물의 교역'을 통해 밝혀내고 있죠. 저도 이 관련 논문을 읽고 있는데 정말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어렵고 복합적입니다'. 자수란 렌즈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지혜는 무궁무진하더군요. 초면인데도, 오랜동안 뵌 분처럼 이야기를 하는 순간순간이 저로서는 지적 충동과 즐거움, 행복이 가득하게 채워지는 순간이었네요. 다음에 기회되시면 꼭 정영양 자수 박물관에 마실 한번 가보세요. 상설전시는 정말 볼 만합니다. 저도 자주 가서 공부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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