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단아하고 견고한.....숨결같은 배우
대학로에 나갔다. 대학로에 때아닌 정극 바람이 분다. 좋은 징조다. 지나친 속도전을 방불케하는 뮤지컬 장르에, 소비자들이 지친 탓이기도 하고, 그만큼 시대의 우울이 내면 깊이 드리워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숨을 고르고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재점검한다고 할까?
연극 <기묘여행>의 공연 첫날, 부랴 부랴 인터뷰 약속을 잡고 극장에 도착했다. 공연이 시작되는 3시까지 주어진 시간을 짧았지만, 연출자의 허락을 얻고 이번 <기묘여행>의 주연배우 예수정 선생님을 뵈었다.
영화<황진이>에서 그녀는 송혜교의 엄마역이었다. 영화<기담>에서는 그로테스크한 강력한 힘을 발산하는 원장님이었다. 최근엔 <엄마, 여행갈래요?>에서 영화배우 김성수의 엄마역을 맡았다.
1979년 극단 뿌리의 '고독이란 이름의 여인'으로 데뷔한 이후 30년이 넘는 세월을 무대에서 살았다. 30년이 넘는 연기이력을 가진 중견배우 예수정. 연극과 영화 양쪽에 걸쳐 배우로서 치열한 생을 살아온 경력을 일일이 늘어놓기도 어렵다. 내가 기억하는 배우 예수정의 모습은 <신의 아그네스>에서의 원장수녀역이다.
<신의 아그네스>는 80년대 초연된 후, 윤석화, 차유경, 신애라, 김혜수등 당대의 스타들이 이 작품에 출연했다. 2007년 12월 초, 유럽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던 따스한 초겨울, 자유소극장에서 손숙과 함께 무대에선 배우 예수정을 만났다. 신의 섭리와 인간의 의구심 사이에서, 내적인 갈등을 섬세하게 조율하며 아그네스를 변호하던 그녀의 모습이 망막에 한꺼풀 입혀지던 날이었다.
이후로 김혜자 선생님과 함께 더블 캐스팅으로 출연한 <다우트>에서도 원장수녀님을 역을 맡아 열연했다. 머리로 하는 연기와 몸에 체득한 무늬가 발산되는 연기의 차이를, 예수정은 보여주었다. 그녀의 연기는 한마디로 진실성에 기반한 몸과 정신의 연기다.
미려한 연주를 위해 사용하는 '꾸밈음'을 무대안에 들이지 않는다. 캐릭터에 몰입하는 열정과 성격화 작업에 접근하는 태도엔 '견고함'이 자리한다. 한 마디로 균형을 놓지 않는 배우란 뜻이다. 뮌헨대학교에서 연극학을 공부한 지성파 배우. 고 정애란 선생님(전원일기의 할머니역)의 따님이지만, 이런 사실들은 배우 예수정의 진면목을 읽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배우는 무대에서, 관객들과의 호흡을 통해서만 입증되어야 한다. 무대에서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몸 속 깊이 새겨진 청연한 녹빛이 배우들과의 교감 속에서 밖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걸 가능케 하는 이가 진정한 배우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배우 예수정은 2005년 제 10회 히서 연극상 과 2005년 제 26회 서울연극제 연기상을 수상했다.
인터뷰는 오늘의 공연 <기묘여행>을 중심으로 이끌었다. 작품 소재가 '사형제도'에 관한 담론이다 보니, 언론의 취재열기도 뜨겁다. <기묘여행>은 2004년 일본의 토시노부 코죠우가 쓴 작품으로 사형수와 피해자의 부모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살해당한 딸의 부모와 딸을 죽인 청년의 부모가 만나 사형이 확실시 되고 있는 그 청년을 면회하기 위해 함께 교도소에 가는 여정 속의 이야기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길, 딸의 살해범인 사형수를 직접 죽이겠다는 아빠, 항소를 포기하고 사형을 받아들인 살해범, 교도관으로 사형집행 경험이 있는 코디네이터 등 살의와 죽음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기묘여행>은 살인을 둘러싼 다양한 인간들의 면모를 통해 생명의 순수와 존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Q : 안녕하세요. 이번 <기묘여행>에 출연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A : 우선 연출자인 류주연 선생님에 대한 믿음이 컸어요. 배우들에게 많은 에너지를 주는 연출자에요. 무엇보다 극에 끌렸지요, 마치 희랍비극처럼 고난이나 문제가 닥쳤을 때 우회적으로 돌아가기 보다, 마음 속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들어가며 집요하게 끌어가는 스타일의 작품이에요.
Q : 맡은 역을 보니 살해를 당한 딸의 어머니역입니다. 대본을 읽으면서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데요. 실제 극 속 캐릭터는 어떤 것 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A : 섬세한 균형이 필요한 캐릭터가 아닐까 싶네요. 감정을 흘리기 보다는, 겉으로는 철저하게 평정심을 보이는 인물이죠. 물론 격정에 휘몰릴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평상시엔 잘 정돈되어 있는 사람이어서, 타인들에게 누를 끼치지도 않죠. 고통의 감정을 다른 이들과 나누면서 조화시키려고 무던 애를 써요.
Q : 내면의 깊은 연기를 필요로 하는 역일 듯 합니다. 제가 보기엔 선생님께 가장 잘 어울리는 배역일 듯 한데요. 이번 작품과 상관없는 질문입니다만, 예전 지금은 충무로 최고의 영화배우인 김윤석씨와 함께 <가을날의 꿈>이란 작품에 나오셨잖아요?
A : <가을날의 꿈>은 북유럽 작가인 욘 포세의 작품인데요. 기본적으로 사랑이야기지만, 북유럽 스타일의 정서가 녹아 있어요. 저도 이 작품을 하면서 많은 걸 느꼈는데요. 미래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 현재의 시간은 항상 미래로 흐르고 시공간이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열려있는 문과 같은 것. 철학적인 의미까지 함께 배웠던 좋은 작품으로 기억합니다.
Q :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배우 인터뷰를 할 때마다 제가 꼭 하는 질문이죠. 선생님의 '배우의 존재론'은 무엇입니까?
A : 저는 사실 대학에선 독문학을 공부했고요. 독일에서 연극학을 했지만 항상 제 마음의 출발점은 문학과 사회였어요. 브레히트를 좋아했고 그의 말 처럼 '극장은 시민을 계몽하는 공간이다'와 같은 주장에 끌렸죠. 그런 믿음이랄까 이것이 저로 하여금 연극무대에 서게 한 힘이 되었습니다. 사회를 계몽하는 작은 힘. 무대 위에서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사회적 행동'이 되고 그것을 통해, 관객들이 '믿음과 가르침'을 얻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브레히트는 배우는 사회적 행위자라고 말했다. 배우는 사회를 반영하는 일종의 거울이다. 브레히트는 역사의 현장을 변경시키는데 기여하는 것이 연극이라고 믿었다.사회비판과 예술적 실천의 여백 사이에, 바로 배우가 서 있다. 그는 "이제 우리는 세계의 변화 가능성을 부각시키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을 비춰줄 불빛을 향해 계속 전진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연기를 통해, 관객들에게 '자기확인'을 시키고 또 어떤 배우는 '현실을 감내하고 견인하는' 위안의 순간을 준다. 배우 예수정은 어디에 서 있는가? 그녀는 지금 관객에게 보여줄 자신의 모습을 다듬기 위해, 영혼의 거울 앞에 서 있다. 사형제도의 정당성과 그 속에서 '상처를 가득 입은 채 현실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엄마로써 말이다. 그러나 거울앞에 선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단아하고 견고하다.
공연 전 치열한 시간과의 싸움 속에서, 인터뷰에 응해주신 예수정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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