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청바지 클래식

물랭루즈는 가라, 산대희가 뜬다

패션 큐레이터 2010. 3. 15. 17:06

 

#1 산대희가 뭐길래

미만한 연두빛 대신, 흐리고 탁한 봄비만 연일 내린다. 우리를 둘러싼 정치적 풍경을 투영하려는 것인지. 하늘은 애꿎게 잿빛 부산물만 땅에 내린다. 이럴 때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동양의 고전 <예기>의 악기편에도 '세상의 소리엔 그 시대의 정치적 미감'이 녹아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당대의 지배적인 소리에는 '신음하는 사람들과 풍요에 쩔어 아픈이들의 목소리를 몸으로 느끼지 못하는 자들의 웅성거림'이 섞여있다.

 

 

오늘 참관한 <산대희>는 '산 모양의 구조물에서 벌이는 연희'라는 뜻이다. 전설 속 삼신산을 형상화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백가지 즐거움이 녹아있는 노래와 춤'이다. 신라 진흥왕 때(6 세기) 부터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만큼, 서양의 오페라의 탄생(16세기)에 견주어도 시간적으로 한 세기가 앞선다. 국가경사와 외국 사신을 환영하기 위해 왕실에서 행해진 대표적 축제인 산대희는 야외무대를 이용했다는 점에서, 서양의 무대연희의 진화과정과 비교해볼 때, 손색이 없다. 단 600명이 넘는 광대가 등장하는 만큼 엄청난 예산이 필요했기에 조선 중기 인조반정 이후 금지된 역사를 갖고 있기도 하다.

 

 

#2 소리꾼 장사익의 카리스마

 

이번 공연에서 주목할 지점은 3가지 측면이다. 서구에선 민족국가 형성 이후 군주들은 왕립극장의 형성을 통해, 당대의 문화를 지배했다. 우리가 만약 500년전 <산대희>공연을 상설화 하기 위해 '연희극장'을 세웠다면 어땠을까. 아니 당시의 모습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어떻게 변모했을까? 이번 <산대희> 공연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듯 하다. 두번 째, 극장공연의 진화를 다루기 위해, 어떤 요소를 삽입하고 관객과 소통할 수 있을까의 문제다. 전통성을 살린 우아함과 기품, 그러나 대중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보인다. 음유시인 장사익은 삼베처럼 깔깔한 듯 보이지만, 유연하게 가슴을 아리는 목소리로 우리시대의 '상처'를 토하고 껴안아낸다. 그가 부른 곡은 <봄날은 간다>와 <찔레꽃> 그리고 <희망가>는 우리시대에 정치적 풍경의 이면을 관통하는 슬픔을 표현했다. 들으면서 어찌나 애잔한 눈물이 흐르던지. 장사익은 꾼이다. 그의 소리는 세상을 묘사한다.

 

#3 전통과 현대, 그 긴장을 애두르는 정신

 

아스라한 달빛아래, 한 여자 해금을 켠다. 단 두줄의 현에서는 우아한 기품이 쏟아지고, 여인의 우윳빛 피부만큼, 명결한 현의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관통한다. '내 마음 파랑'이란 제목의 해금연주가 끝나면 장사익의 노래가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무용수들의 하늘하늘한 몸짓. 우리는 항상 '한국적인 것'과 '한국적 특질'이란 질문 앞에서 멈칫한다.

 

전문가 집단도 사실 이 질문에 어지간한 대답을 하기 어렵다. 그러니 무대화도 항상 어렵다. 퓨전 양식으로 모든 가무를 합하고, 비보이를 불러 풍물과 하나로 뭉친다고 해서, 그것이 현대화냐고 묻는다면, 글쎄 나는 답변을 유보할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민요를 부르는 김혜란 명창이 굿거리를 들고 극장 사이사이를 걸으며 관객들과 소통하고 말을 건내는 모습은 편안하다. 인간문화재 김대균 선생의 줄타기 공연을 기대했건만, 무대상의 문제인지, 첫눈에 보기에도 줄타기 장치가 느슨해 보였고, 아크로바트는 평작 수준에 머물렀다. 물론 줄타기는 연희자의 기예도 중요하지만, 줄타기꾼과 재담꾼의 '말놀이'에도 그 눈이 머물러야 한다. 그만큼 우리 전통연희는 항상 상호작용이 넘친다. 서양의 극장무대는 철저하게 관객의 시지각에 의해 규정되고 해석되지만, 우리 한국의 연희는 철저하게 '말과 행동, 바라봄'이 엮이는 세계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산대희의 해석은 충실한 노선을 따랐다. 무리수를 두지않고 편안하게 갔다는 말이다.

 

#4 여전히 극복해야 할 과제

이번 공연을 보고 난 후, 느끼는 점은 우리가 가진 전통연희의 종류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거다. 서양의 극장문화와 공연방식에 익숙한 이들에게, 전통의 옷을 벗기고 그들의 옷을 입히는 작업이 그만큼 만만치 않다는 말이다. 비보이와 산대놀이가 함께 무대에서 춤을 추는 건, 솔직히 좀 지겨울 정도로 잦은 연출로 인해 식상한 느낌마져 있다. 게다가 만담꾼이라 나온 이들은 적절하지 않을 만큼의 '명비어천가'를 부르기도 하고. 썰렁한 입의 재담만 펼쳐졌다. 물론 장점은 더 많다. 특히 산에 만든 무대를 재현하기 위한 기술적인 입체성도 돋보였고, 조명을 맡은 고희선 선생의 손길도 그대로 잘 살았다. 주요 스태프들의 면모를 보니, 혁신보단, 안정되게 무게감이 있는 무대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느껴진다.

 

 

모든 극은 관객과의 소통을 상수로 한다. 소통은 바로 그들의 호흡수준을 공연이 받쳐줄 때 가능하다. 느림과 빠름, 격정과 우미를 적절하게 배합하는 이유다. 공연에 거는 기대가 큰 까닭은 이번 <산대희>공연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고, 극장식 공연으로 상설화할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500년이란 시간의 흐름 속 진화의 방향"을 상상력으로 풀어냈지만, 부족한 차액분은 남는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산대희>공연은 당시 귀족과 지배계층을 위한 연희란 '존재론적 속성' 또한 시간 속에서 지웠어야 하지 않나 싶다. 어차피 왕조사회의 산물이었던 문화를 오늘날까지, 이어오면서, 계급의 유무에 상관없이 한 무대에서 촘촘하게 보여주기 위한 방식은 뭘까? 어떤 요소가 더 삽입되어야 할까? 이 부분이 명확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아쉽다. 예술감독을 맡은 유영대 교수는 이 부분에서 나름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아주 치열하게. 그는 항상 한국의 전통연희를 현대적 맥락에서 풀어내기 위해 불철주야 고민하는 연출가다.

 

무대를 보고 있노라니, 예전 보았던 드라마 <황진이>가 갑자기 생각났다. 황진이는 저자거리에서 자신의 춤사위를 선보이지만, 어느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다. 그때 그녀에게 답을 준것은 시장에서 민중을 상대로 춤을 추는 패거리와 거지들의 무브먼트였다. 흔히 무용은 인간의 몸을 빌어, 자신의 정신을 전달한다. 이때 몸에서는 일련의 에네르기가 발산한다. 세계적인 무용 평론가 존 마틴은 이걸 메타 키네시스라고 불렀다. 몸은 계급의 유무와 경제적 급부에 관련없이, 닿는 촉지의 순간, 교감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릇이다. 서양의 비보이가 한국적 비보이가 된 것도 같은 맥락일거다. 왜 장사익의 목소리에 울었겠는가? 어디 그의 목소리가 지향하는 대상이 왕후 귀족이던가? 희망을 꿈꾸는 세대, 여전히 어둡고 습한 담즙만이 분비되는 이 땅의 정치적 부당성을, 목놓아 불러내기엔, 산대희는 사실 너무 화려한 세계다. 장사익 선생님이 부른 <희망가>를 찾았으나 아쉽게 Daum에선 음원을 구하지 못했다. 장사익 선생이 부른 다른 노래 보다, 이 <희망가>를 들을때 울컥 눈물이 나는이유는 뭘까? 시대의 소리엔, 그 속에 '아프고 저리게 상처받은 자들의 소리'가 섞여 있기에 그렇다. 분홍빛 입춘대길을 말하기엔, 여전히 우리가 통과해야 할 터널이 깊다. 갈아엎어야 할 묵정밭도 너무 넓고.

 

첫술에 배부를 생각은 없다. 단절된 과거를 복원해, 상설화 하는 작업이 어디 한 두번의 시도로 이뤄지겠는가. 내가 여전히 <산대희>공연에 주목하는 이유다. 수고했던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사진제공: 노승환 (사진저작권은 사진작가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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