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이런 엄마를 버리고 싶다-영화'아무도 모른다'리뷰

패션 큐레이터 2010. 3. 2. 07:00

 

S#1 때로는 가족을 버리고 싶다.

 

캐캐묵은 비디오 서재 속 감춰둔 영화를 찾았다. 오랜시간 영화작품들을 컬랙팅 했다. 삼일절 휴일을 맞아 한 편의 영화를 골라봤다 <아무도 모른다>. 영화를 모으는게 취미긴 해도, 정작 사놓고 보지 않고 꽂아둔채 잊혀진 것들이 많다.

 

Daum 뷰 영화란엔 최신 영화 리뷰들이 전쟁을 치룬다. 나 처럼 시간이 지나도 한참이 지난 고전 영화들을 찾아 일일이 포스팅 하는 블로거는 많지 않다. 기껐해야 3-5년 터울이 다다. 앞으로 '영화에 홀리다' 폴더에는 세계 영화사에 남을 영화들을 종종 다뤄 볼 생각이다. 조회수는 포기한지 오래고, 기대도 안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거란 생각. 그저 스쳐 지나온 것들을 이곳에서나마 조금씩 모아 데이터로 모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최근에 <행복의 조건>이란 책을 읽었는데 여기에서 아주 멋진 결론을 찾았다. 사람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6가지 생의 과제를 풀게 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의미의 수호자' 역을 맡아 살아내는 거란다. 즉 지나온 전통과 생의 의미들을 엮어, '뒤에 남겨야 할 가치들'을 추려내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역할이다. 미술품을 컬렉팅 하거나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운동을 벌이는 일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딱 내 스타일에 맞는 생의 과제이지 싶기도 하고,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기도 했다.

 

이 글을 끝내고 꼭 다루고 싶은 작품이 하나 있는데 1978년 칸 영화제 수상작인 <우든 크로그>란 작품이다. 에르마노 올미 감독의 이 '나막신 나무'는 19세기말 북부 이태리의 한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해서, 다섯 집안의 농부가족들의 일상을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기 그지없게 그려낸 가작이다. 땅으로부터 그 존재의 의미를 찾는 농부들의 모습을 진솔하게 그림으로써, "농부들의 슬픔과 기쁨, 그 생명력이 극명하게 부각된 일련의 에피소드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이 영화는 인간정신의 강함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찬사이며 일상적인 이태리 농촌생활의 흐름에 대한 선명한 기록이기도 하다."

 

난 가족을 다룬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아무도 모른다>를 보게 된 것도 작년말에 본 <걸어도 걸어도>란 작품의 연출자와 같아서였다. 고레에다 히로가츠는 가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자주 만든다. <아무도 모른다>는 2004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작품이다.  2004년 박찬욱 감독의 야심작 <올드보이>가 칸에 입성했을 때, 내심 연기상 수상을 노렸던 최민식. 그러나 칸의 심사위원은 14살 소년을 선택했다. 웃음의 이면에 숨은 슬픈 눈을 가진 아이. 야기야 유이란 연기자를 발견한 것이다.

 

 

S#2 가족의 해체-현대 일본의 미시적 생태 보고서

 

영화 <아무도 모른다>엔 철딱서니 없는 한 명의 엄마와 4명의 아이가 등장한다. 각자 아빠가 다른 아이들이다. 경제적으로 힘들긴 해도 백화점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버는 엄마와 학교에 가지 않은채, 아이들을 돌보는 큰 아들 아키라가 있어 든든하다.  어머니 케이코와 아키라, 교코, 시게루, 유키 이렇게 5인가족은 새 집으로 이사를 한다. 집주인에겐 아버지가 아버지가 해외 근무 중이어서 어머니와 아들 둘이서 산다고 거짓말을 한다. 아이들은 소리내어 떠들거나 베란다에 나가지도 못한다. 들키면 쫓겨나기에. 아이들은 놀랍게도 약속을 잘 지킨다.

 

 

어느날 엄마는 아키라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집을 비우겠단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돌아오겠단 말을 남기고. 아키라는 말한다. '엄마는 너무 제멋대로야' 라고. 엄마 케이코는 반박한다.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라고. 영화는 두 개의 주장 중 어떤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식으로 무게를 싣진 않는다. 이 주장을 들으면서 가족학자와 페미니스트가 이 문제를 놓고 싸우면 딱 나오는 '두 개의 주장'이지 싶어 헛웃음을 지었다. 중요한 건 남아있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의 삶과 상처는 어디에서 치유받아야 하나. 영양결핍상태를 겨우 메워주면 양육인가? 아키라는 엄마에게 지속적으로 학교에 보내달라는 말을 한다. 뻔뻔스런 철부지 엄마 "학교 나오지 않아도 훌륭하게 된 사람들 많아"라고 말한다. 누구? 라고 말하자 말끝을 얼머무린다.

 

 

엄마기 집을 비운지도 수 개월째. 돈도 다 떨어지고 집세도 내지 못하고, 전기와 가스, 수도가 끊어져도 아이들은 잘 산다. 공원에서 물을 받아 씻고, 폐기처분될 초밥을 편의점에서 받아 먹고 산다. 아이들은 커간다. 사춘기의 소년은 이성에도 눈을 뜨고, 아이들과 놀고 싶었을 거다. 주인공 아키라의 삶이 버겁다. 아버지란 자들을 찾아 생활비를 꾸러 다니지만, 냉담할 뿐, "유키는 내 아이가 아니야. 난 항상 콘돔끼고 했거든' 이따위 소리나 늘어놓는다. 막내 유키는 발을 헛디뎌 죽음에 이르고, 여행용 가방에 아이를 싸서 공항 근처에 파묻는다. 유키에게 비행기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그렇게 지킨다.

 

아이들은 배고파도 구걸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진 않는다. 영화 속엔 아이들과 친구가 되는 여학생이 나온다. 사키는 여고생이다. 그녀는 넉넉한 집안의 딸로 보이지만 학교에 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왕따 때문인듯 보인다. 친구란 것들은 그녀의 신발 위로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며 괴롭힌다. 동병상련 때문인지, 사회적으로 배제된 아이들은 서로에게 끌린다. 돈이 없어 절절 매는 아키라를 위해, 사키는 원조교제를 하고, 그렇게 돈을 내어주지만, 거절한다. 하지만 너무 어려운 탓에, 끝내 그 돈을 받는다. 악순환의 모순은 끊어지지 않고 연속된다.

 

 

S#3 아무도 돌보지 않는 자의 슬픔

 

이 영화의 프레임 하나하나엔, 슬픔이 묻어나온다. 이 영화는 건강한 가정이란 무엇인가란 식의 질문을 던지진 않는다. 최근 가족해체의 급격한 증가는 한국사회에 모자가정의 빈곤화라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사회에서 가족해체로 인한 모자가정의 빈곤화에 대한 사회정책의 가시적 대응은 전무한 실정이다. 가족구조의 변화 즉, 이혼 및 별거 등으로 야기되는 가족해체로 인한 모자가정의 빈곤문제에 대한 정책적 대응으로서 사회안정망의 역할은 점점 더 줄고 있다. 현 정권 들어 모자 가족에 대한 지원은 더욱 줄었다.(만약 이 글을 읽고 늘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행정담당자가 있다면 자료를 내놓으시라)

 

가족해체로 모자가정만 생기는 건 아니다. 최근 편부가정도 늘었다. 가족 해체로 인해 이들은 신 빈곤층으로 편입된다. 이들 가정에 대한 긴급 요구에 대한 공공부조 개입의 지체, 낮은 급여수준, 불충분한 아동양육비 수준 등과 같은 부적절하고  비효율적인 사회안전망으로 인해 모자가정의 빈곤화가 가족해체이후 심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족해체의 문제를 사회적 관점에서 풀어가는 것이 시급한 시대다. 문제는 가족해체를 정부와 사회가 최선을 다해서 풀어간다해도, 잉여분이 남는다는 점이다. 아이들이다. 아프고 상처받은 아이들을 국가가 달래주진 못한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정상적인 가족의 보살핌"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물론 페미니스트들이야 중산계층의 '정상가족'개념이

중산층 이데올로기가 포장한 개념에 불과하다 말할 지 모르겠다.  그들은 주장한다. 가족에 대한 기능주의적 발상이 남자와 여자의 성역할을 고착시키니 어쩌니, 중산층 가족을 특권화 하는 계급적 편견을 양산하니 어쩌니, 이성애 결혼 중심주의는 무너져야 한다고. 좋다. 이런 화려한 수사의 세계와 달리, 영화 속 현실이 오히려 더 와닿으니 나 또한 그들이 말하는 '정상가족을 목마르게 찾는' 자들인가?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를 갖고 싸우고 싶지도 않다. 영화 속 현실의 아이들은 그저 배고프고 엄마가 그리울 뿐이다. 못난 어른들은 그저 잠잠하라. 입을 다물라. 뭘 잘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