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청바지 클래식

피나 바우쉬를 생각함-그녀가 보고싶다

패션 큐레이터 2010. 2. 28. 14:36

 

S#1 피나 바우쉬를 생각함

 

작년 6월 30일. 세계적인 안무가 피나 바우쉬가 우리 곁을 떠났다. 무용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일반인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거의 알지도 못할 터, 몇몇 언론에서 안무가 피나 바우쉬의 죽음과 더불어 그녀의 작품 세계를 만 '하루동안' 열심히 다뤘다.

 

내가 피나 바우쉬를 알게 된 것은 대학시절, 4학년 전공수업이었던 연극비평 시간이다. 물론 이전부터 관련된 해외 저널에서 짬짬이 그녀의 독특한 공연과 안무방식, 무용 철학에 다룬 글들을 읽었다. 기말 리포트로 그녀의 삶과 작업에 대한 중간평가를 쓰면서 더욱 그녀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피나 바우쉬는 1940년 쾰른과 부퍼탈 근처의 작은 마을, 솔링겐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조그마한 호텔에 부속된 카페를 운영했는데, 이곳에서 연극을 만났다. 그녀의 춤을 흔히 춤연극이라고 부른다. 이건 발레형식과 드라마, 쇼비지니스가 결합된 형식인데 당시로서는 고답적인 형태의 안무들이 판을 칠 때라, 꽤나 시선을 끌었다. 그는 '녹색 테이블'이란 춤연극으로 2차 세계 대전 후의 정신적 공황을 드러냈던 무용가 쿠르트 요스에게서 무용을 배웠다.

 

그녀의 춤연극이 중요한 이유는 '그녀를 통해' 현대 무용은 한 차례의 정신적 진화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예전 움직임과 음악을 연결시키는 안무된 춤이라는 절대논리를 깨부셨다. 그녀는 오히려 다양한 형식을 통해 무대에서 등장하는 타인들과의 소통과 교류를 중요시여겼다.

 

그녀의 작업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는 건 블로그 공간에선 불가능하다. 그만큼 다양한 작품과, 세간의 비평을 남긴 그녀다. 더구나 한국에서 무용 장르를 글로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현대무용과 발레에 대해 아무리 쉽게 해제를 해도, 일반인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건,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리 속에 퍼포먼스나 연희라고 하면 뮤지컬 정도가 전부인' 한국이기 때문이다.

 

그저 발레나 현대무용은 소수자들의 것이고, 당연히 이해받지 못하는 것 정도로 치부된 것도 현실이다. 무용평론이나 깊이있는 이론 글을 읽기도 어렵다. 당연하다. 이론화 작업은 결국 관객을 상수로 하는 공연현상과 그 배후의 일반화 과정이다. 공연을 보기도 어렵거니와, 공연을 보는 사람들이 전공자로서만 구성된 '사회 공동체'에서 무용에 대한 대중적 상식, 혹은 이해를 위한 글쓰기를 한다는 건 무모함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나는 전체적인 조회수의 하락에 상관없이 무용에 관한 글을 종종 쓸 생각이다. 생각해보면 '해설이 있는 발레'같은 프로그램들은 표가 없어서 못산다. 그만큼 대중들이 마냥 클래식에 눈을 감고 있다는 식의 개탄은 곤란하다. 결국은 소통의 문제고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를 경영적인 관점에서도 살펴봐야 한다. 언제까지 정부지원금만 바라고 살 것인가? 왜 신인 무용수나 안무가들은 기존의 무용계에 도전장을 던지지 못하는가? 멋진 싸움꾼 하나가 나왔으면 좋겠다.

 

S#2 막장 드라마 보다 무용이 필요한 이유

 

요즘 텔레비전 방송엔 딱 두 가지 코드만 있다. '막장과 버라이어티'다. 사회 전반에 따른 윤리성을 생각하고 '바른 사회'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시사 프로그램은 하나같이 '좌파'란 해괴한 딱지가 붙은 채, 도중하자하고 있다. 그나마 책을 읽어주거나, 독립영화와 연극과 같은 '지켜야할 작은 문화'의 층위로 침식된지 오래다. '경제성장주의 담론과 경찰폭력'에 맞서, 값싼 웃음과 연예인의 치부 들추기가 '생의 위안과 오락'거리가 된지 오래다. 감각적인 세계를 넘어, 폭력과 말에 의한 상처로 점철된 방송들만 판을 치니, 사람들의 감성 또한 이와 더불어 진화한다. 왠만한 폭력, 피흘림, 죽이고 짓밟는 정도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이번 3월 피나 바우쉬 연출의 <카페 뮐러>가 한국에서 상연된다. 내가 피나 바우쉬를 좋아하는 건, 그녀의 무용이 현대 문화와 철학, 사회 전반에 새로운 정신적 화두로 떠오르는 '몸의 중요성'을 부각 시키기 때문이다. 그녀는 기존의 연극적안 드라마의 흐름과 방식, 인과법칙에 따른 이야기 구조의 진행에 제동을 건다. 이번에 올리는 <카페 뮐러>의 부제가 바로 그런 점을 설명해준다. '이념의 연합'이다. 춤연극을 보면  사랑을 하소연하는 커플이 나오고, 서로 살을 맞대거나, 타인의 몸에 다가서고, 벽을 향해 뛰기도 한다. 껴안고 내치고, 또 한 명은 그들이 서로 포옹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강압하기도 한다.

 

 

특히 남녀관계를 다룬 다는 점에서, 그녀의 춤은 색다른 생각의 장을 제공해왔다. 작품 속에서 남녀의 상호작용과 몸의 교차는 주요한 테마로 등장한다. 그녀의 춤 연극은 인접한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의 영화감독인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Talk to Her이란 작품은 피나 바우쉬의 춤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그녀는 인위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지 않는다. 그냥 텅 빈 무대와 반대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무대, 두 사이의 공간을 오가며, 일상적인 삶을 관찰하고 이를 몸으로 옮겨낼 뿐이다. 피나 바우쉬의 무용은 항상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삶의 조건'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던진다. 막장 드라마에는 삶의 조건에 대한 반성이 없다. 반 윤리적 자극을 통해 "현재 네가 받는 자극은 약소한거야"라고 하찮은 위로의 말을 건낼 뿐.

 

 

연극공부를 했지만, 최근 들어와 연극 보다 무용에 더 관심이 간다. 무대 위 무용수들의 몸은 단순한 인간의 몸이 아니다. 그들의 몸은 무대 위에서 상처받고 피 흘리고 간절히 아픈 우리의 몸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의 몸은 상처로 덮혀 있다. 정신적인 상처, 물리적 상처, 경찰의 폭력과 정치권력의 억압에 눌리고 하소연할 수 없어 더욱 아프다. 국회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삶이 오히려 '막장'인 시대, 부진한 몸을 이끌고, 비루한 생의 흔적을 그려가야 하는 우리들만 힘들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막장 드라마 속 '나 보다 더 한 사람들'을 보며 얻는 일 순간의 위무가 아니다. 현실을 관통하는 감성, 우리를 둘러싼 현실의 외피를 벗기고, 몸을 통해 체득하는 삶의 부조리를 적어가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 무용은 중력의 힘에 저항하는 인간의 몸부림이다. 결국 죽음의 사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악착같은 몸짓. 그 저항은 일순간에 끝나지만, 그 과정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우리내 삶처럼 말이다.

 

 

유튜브에 있는 카페 뮐러 공연의 일부를 올립니다. 짤막하게 피나 바우쉬 인터뷰도 들어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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