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청바지 클래식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패션 큐레이터 2009. 11. 18. 00:41

 

S#1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초 겨울의 날씨치곤 갑자기 불어닥친 한기가 뼛속깊이 파고들며, 영혼의 송연함을 빚는 하루였습니다. 푸른 우울증의 무늬를 살펴보며 바닥으로 한없이 떨어지던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뭔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느낌. 차가운 계절을 사랑하는 건, 나를 둘러싼 풍경의 냉감각과 그것을 피부로 맞으며 거울 속 대칭의 구조로 피어나는 따스한 기운이 느낄수 있어서 입니다.

 

로트렉의 그림처럼 무표정하게, 시무룩하게 청연한 녹이 끼어버린 앤티크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금씩 핏기가 돌아오는 자신을 발견하고선 왠지모를 신이 나기도 하고, 힘이 나는 제 자신을 응시하게 되네요.

 

시린겨울, 관절염의 고통처럼 때가되면 욱씬거리는 지난 사랑의 기억을 생각하고 싶을 때, 종종 예전에 읽었던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꺼내듭니다.

 

세 남자의 사랑과 집착, 불행과 행복이 교차하며 뒤섞여 있는 무료한 일상을 그려내는 작가의 심리묘사는 지금 읽어도 감탄하고 맙니다. 작품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곡이 바로 브람스의 곡들인데요.

 

오늘은 시간을 내어 국립극장에 갔습니다. 한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정기연주회를 들으러 갔습니다. 지휘를 맡은 조정수 선생님과 다음에 뵙기로 한 상태였던데다, 제가 주로 모이는 정기모임에 참서하고 싶어하셔서, 저도 이분의 지휘하시는 모습이 궁금했죠.

 

우선 모짜르트 심포니 제 6번으로 시작합니다. 초겨울의 신산함을 잊게 하려는 듯, 선율이 전반적으로 청초하고 밝습니다. 따스한 음율의 담요를 덮고 언 영혼을 녹이려는 듯, 현과 목관, 타악의 운동감이 적절히 배열하며 음의 그림을 그립니다.

 

 

서양음악과 우리 선율에 뛰어난 열정을 가진 지휘자답게 두번째 연주곡을 국내 작곡가 임준희의 <한강>을 골랐습니다. 한국의 클래식 음악계가 가진 고질적인 문제중의 하나가, 연주자 중심의 육성에 머물다 보니, 작곡가를 키우는데 등한시 한 것입니다. 연주자는 결국 작곡자와의 권력관계로 볼때 종속적인 면이 많기에, 음악의 주체성이랄까, 자기화를 위해서는 결국 작곡이란 영역을 키워야 합니다. 물론 지휘자의 육성도 중요합니다.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의 정점입니다. 그는 때로는 독재자가 되어야 하고, 때로는 화합을 꿈꾸는 리더가 되어야 하죠. 음악에 대한 이해를 넘어, 인간과 조직을 다루는 기술이 있어야 하고 전체는 부분의 총합보다 크다는 원리를 항상 '연주행위'의 지휘를 통해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 지휘를 맡은 조정수는 우리시대의 젋은 지휘자로 서양음악 출신 최초로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임명되었던 분입니다. 그래서일까 항상 공연의 레퍼토리엔 우리민족의 음악, 혹은 민족 관현악이라 부를 수 있는 음사위를 삽입해 레퍼토리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죠. 기대해볼 만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두번째 연주된 임준희의 '한강'은 우리의 민요 정선아리랑의 선율을 차용해 사용합니다. 곡 전체를 듣다보면 지속적으로 화음이 분산되는 걸 느낄수 있는데요.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의 유장함,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의 맥이 지워지지 않음을 내포하고 있다지요. 강은 민족의 역사이자, 생명의 의지입니다. 아픈 역사를 관통해 흐르는 탓에, 강은 상처의 기억을 담은 저장고가 되기도 하죠. 이 곡이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건, 북해에서 흘러 들어와 벨기에의 마스 강을 따라 독일, 헝가리, 유고, 루마니아를 거쳐 흘해로 흘러 나가는 다뉴브강과 한강에 담긴, 아픈 근현대의 역사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인터미션이 끝나고 기다리던 브람스의 심포니 2번이 올라갑니다. 흔히 브람스를 리틀 베토벤이라고 부르죠. 그래서인지 사실 이 곡도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 교향곡의 상당 부분과 공통분모를 자랑합니다. 건강이 나빠진 브람스가 오스트리아 남부의 휴양도시 페르차하에서 머물며 영감을 얻어 작곡한 심포니 2번. 위의 사진에 등장하는 풍경이 바로 페르차하의 모습입니다.

 

오스트리아를 다시 한번 가고 싶습니다. 사실 외국에서 유학할 때, 우연한 기회로 오스트리아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여자 교수님과 채팅을 하면서 굉장히 가까와진적이 있습니다. 아버님도 작곡가시고 집안 전체가 음악을 하시더군요. 이분이 잘쯔캄머구트에 다녀와 보내준 사진을 보니 어찌나 그 풍광이 곱던지요. 그 덕에 출장갈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않고 가보려고 했던 곳입니다.

 

 

로맨틱하고 서정적인 1악장을 넘어 2악장으로 가면 진지한 몽상가였던 브람스의 면모가 드러납니다. 깊은 명상에 빠지듯, 적요한 정취를 드러내는 선율은 페르차하 강가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닮은 듯 합니다. 전체적으로 경쾌한 선율이 너무 좋습니다. 유쾌함이 전체적인 정조를 이루다 보니, 듣는 와중에도 마음 한구석이 편하게 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번 달은 청각이 행복한 시간이네요. 저번 주 토요일엔 파주 헤이리에서 열린 그림 전시회와 음악회에 다녀왔거든요. 오보에와 플루트 소리에 취해 있다가 쌀쌀한 헤이리 미술관 거리를 걸었습니다. 이번에는 심포니네요. 모든 악기들이 마치 무언의 의사소통 장치가 있는 듯, 어찌나 그렇게 일관된 소리들을 토해내는지, 이 모든 걸 가능케 하는 지휘란 영역과 그걸 해내는 분이 존경스러운 하루였습니다.

 

벌써 한주의 중간이네요. 내일은 시간을 내어 한복연구가 김인자 선생님과 미팅을 합니다. 최근 한복을 비롯한 침선장, 매듭장, 염색장 등 이 땅의 공예대가들을 만나 한권의 책으로 묶어보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영문으로 쓸 예정이라 무게가 만만치 않지만 제게도 좋은 배움의 기회가 될듯 해요. 브람스의 심포니 제 2번 라장조 작품 번호 73번을 올립니다. 특히 3악장은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등장해서 인기를 얻었었지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이제 저도 잠자리에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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