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청바지 클래식

거문고 소리에 젖어-천지현황의 뜻을 묻다

패션 큐레이터 2009. 10. 30. 01:09

 

 

오늘 일을 마치고 국립국악원으로 향했습니다. 거문고 연주회가 있어 참석했어요. 처음엔 참석할까 말까, 선약도 있는 지라 고민을 좀 했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마음이 끌렸던 건, 인생에서 거문고 소리를 한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는 거였어요. 가야금 산조나 다른 국악 연주는 꽤 들어보기도 한 것 같은데, 유독 이 거문고는 참 멀리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술의 전당으로 걸어가는 길,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 들리는데요. 이제 그 10월도 이틀밖엔 남질 않았네요. 10월이란 시간성에 방점을 찍기 위해, 국악원에 들어가는 길이 고적합니다. 시간이 남아 잔디밭 길을 따라 산책 하다가 들어갔어요. 극장 앞에서 왜 담요를 주는 지 이제서야 알겠네요. 달빛 고운 날엔 테이크 아웃한 차 한잔 가지고 널브러진 마당에 앉아 도란 도란 수다를 떨어도 좋겠습니다.

 

거문고 소리를 들은 날 후기를 쓰려니 지식도 부족하고 그저 옛 그림 속 여인들이 타던 악기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신윤복의 그림 중 <줄 고르는 여인들>이란 작품이 있더군요. 이 그림에 등장하는 악기가 바로 거문고입니다.

 

거문고가 남성적인 음색을 낸다는 말을 읽어본 적은 있습니다만 실제 음색을 들어보니, 정말 놀랍습니다. 가야금이 여성적이라면, 거문고의 현을 통해 울려퍼지는 소리는 심중을 관통한다고 할까요? 육중하면서도 선연한 느낌이 무대 사이로 퍼집니다.

 

오늘 거문고 연주회를 특히 보고 싶었던 이유는 연주되는 곡들이 대부분 현대작곡가들이 새롭게 개작하거나 작곡한 작품이라, 그 느낌이 궁금했어요. 두 개의 가야금과 더불어 연주되는 "건초타는 풍경"을 들었습니다. 작곡가 김대성은 민요채집을 하며 시골마을을 다니며 건초타는 모습을 자주 보았나 봅니다.

 

이외에도 <거문고와 전자음향을 위한 "심음">이란 곡은 인재로 크게 훼손된 태안반도에 대한 생각을 음악으로 풀어낸 곳이었는데요. 물소리, 꽃의 화개와 조락, 갯벌에 쏟아지는 햇살의 변화 등, 다양한 심상을 떠올리기 위한 전자악기음을 병율시켜서 독특한 사운드를 표현해냈습니다.

처음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끌리는 강렬함의 배후는 무엇일까요? 이제까지 꽃별님의 해금연주나 죽파선생님의 가야금 산조 정도를 앨범으로 들으며 알음알음 알려고 노력한 게 다인 제겐, 이날 거문고 소리는 참 딱 집어내어 설명하기 힘든 힘이 있더군요.

 

왼편의 그림은 조선시대 이경윤이 그린 <월하탄금도>입니다. 말 그대로 달 빛 아래 탄금, 거문고를 켠다는 것이죠. 이 그림의 부제는 무현금의 풍류입니다. 풀어보면 현이 없는(줄이없는 거문고)를 켜는 즐거움이란 뜻이 되겠죠. 그림을 보면 자연과 인물의 대비가 뚜렸하고 자연의 면모를 세부적으로 그리기 보다, 무현을 켜는 남자의 모습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적요한 공간 속에서, 현이 없는 거문고를 켜는 남자. 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현의 소리를 그는 달빛 아래 악기를 켜며 하나하나 뽑아내고 있는 건 아닐까 싶네요. 그만큼 시와 술과 더불어 남자의 풍류를 규정하는 세가지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거문고였다지요.

 

거문고를 금(琴)이라고 하는 것은 군자가 바른 것을 지켜서 스스로 금(禁)한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즉, 거문고 소리가 울려 퍼지면 바른 뜻을 감동시키기 때문에 선한 마음이 스스로 우러나서 사악한 마음이 생기는 것을 막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현 군자들은 거문고를 타면서 항상 조심하고 스스로 느껴 사악한 것과 금할 것을 조절하였다고 한다.《風俗通義》

 

옛 문헌을 인용했습니다만, 내용에서 알 수 있듯, 현을 뜻하는 금은 곧 스스로 자제하고 금하는 것과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만큼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영혼의 울림을 조율하고 우주의 리듬에 내 자신의 정체성을 맞추어가는 과정이라는 뜻이라고 보여집니다.

 

작곡가 강준일 선생님이 쓴 작품해설의 일부를 옮겨봅니다. "거문고는 노래 이전에 "울림"의 악기이다. 거문고는 우주의 울림을 들려준다. 모든 악기는 그 울림위에서 소리로 노래한다. 그래서 거문고는 우리 소리의 중심이며 모든 악기의 제왕이다. 이런 뜻에서 거문고는 하늘의 울림 현금(玄琴)이라 부르기도 한다. 천자문의 시작, 천지현황은 우주의 근본 하늘과 땅이 검고 누르다로 표현한다. 이런 의도로 거문고의 소리를 현황지곡이라 한다"라고요. 거문고 소리의 팬이 될거 같습니다. 월하탄금도 속 선비의 모습을 닮아가고 싶지만, 여전히 세상의 질서앞에 분개하고 화내고, 사소한 일을 용서하지 못하는 저는, 이 소리를 들을 자격은 없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집에 돌아오는 길, 정신적 사유의 방식을 현의 소리와 결부시켰던 이 땅의 조상을 생각하면, 제 자신이 좀 천하게 느껴집니다. 요즘 그렇습니다. 포용의 그릇을 키워 갈등과 소요을 안아낼 수 있는 큰 마음을 담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오늘도 하루종일 사무실과 이 블로그에서 글을 쓰면서 하찮은 일로 신경만 썼습니다. 음율을 들으며 반성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