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사랑을 기억하는 독특한 방식-영화 '약지의 표본'

패션 큐레이터 2009. 10. 1. 23:00

 

S#1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

 

사랑은 중독이다. 황홀의 봉인을 여는 시간, 내 기억은 자동 각인된다. 그녀의 손을 닮은 폐곡선을 사랑했다. 혈액이 힘겹게 흐르는 연인의 손은 항상 차가왔다. 우아하게 잡았다 떨어지는 순간, 손 위로 파르르한 정맥이 그려내는 묵직한 무언의 언어가 흐른다. 그저 손만 잡아도, 연인의 손을 닮은 우아한 폐곡선엔 무의식적 포옹을 넘어 격렬한 사랑의 땀이 흐르는 몽환의 공간이 자리한다. 그녀가 떠난 시간, 우아한 곡률로 흐르던 손의 기억을 잊기 위해, 내가 할수 있는 것은, 내 손을 자르는 일. 사람들은 그저 잊기 위해 '슬픔'을 봉인하는 기술을 익힌다. 누군가는 '성장'했다고 말하고, 누구는 '상심의 끝에서 아팠다'고 내밀하게 고백한다. 지고 지순한 사랑이 있는가 하면(내사랑 내곁에)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병에 걸리고(내 기억속의 지우개), 반신불수의 몸으로 한쪽 눈을 깜빡이며 세상을 향한 연서를 쓰거나(잠수종과 나비) 심지어는 뇌수술을 받는다(박사가 사랑한 수식). 아내의 모든 옷과 구두를 불태워 버리기도 한다(토니 타키카니)

 

 

곱추여자와 절름발이 남편의 못쓰는 다리, 서로를 때린다. '나가 뒈져, 이 씨앙-놈의 새끼야' 만취한 남자는 목발로 여자의 휜 등을 친다. "아침에 그 여자 들쳐 없고 약수 뜨러가고 저녁이면 가늘고 짧은 다리 수고 했다 주물러도 돌아서 미어지며 눈물이 번지는 인생. 붉은 눈을 서로 피하며 멍을 핥아줄 저 상처들을 목발로 뭉둥이로 후려치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얼마나 어렵고 독한 것인가" 시인 김중의 시편을 읽다 그만 울어버렸다. 아침마다 볶아채는 지리하고 비루한 일상의 폭력이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이 되는 이 사랑은 얼마나 아픈것인가?

 

 

S#2 슬픔을 봉인하는 독특한 방법

 

영화 '약지의 표본'은 사랑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자신을 '표본'으로 만드는 여인의 이야기다. 마술적 몽환의 순간으로 가득한 영상은 아름답지만 사랑의 맹독을 은연중에 풀어놓는다. 그 독의 빛깔은 초기엔 빨강색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는 초록색으로 진화하고 청색으로 완결된다. 이 작품은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박사를 사랑한 수식>을 썼던 오가와 요코의 또 다른 연작이다. 그녀는 인간이 사랑을 기억하고 잊는 방식의 섬세한 과정에 관심이 많다.

 

 

주인공 이리스는 레모네이드 병입자 공장에서 실수로 약지를 잃는다. 노랑색 레모네이드는 한 순간에 붉은 피로 변한다. 이후 공장에서 쫒겨난 그녀는 마술처럼 정체불명의 표본실로 이끌린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기억을 오랜동안 간직하거나 잊기 위해 표본을 만든다. 죽은 작곡가 연인을 위해, 악보에 그려진 음율을 표본으로 만들어달라고 하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불탄 아파트에서 자라난 버섯이나, 자신의 화상자국을 표본으로 요청하기도 한다. 이때 표본은 단순한 사물의 수준을 넘어선다. 표본은 모집단이 되는 생물의 속성을 연구하기 위해 만든다. 일부를 통해 전부를 말하는 것. 표본은 장기기억을 위한 영혼의 화석이다. 사람들은 사물의 일부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을 용해시키기 위해 표본실에 오는 것이다.

 

 

표본실의 원장은 그녀에게 붉은 색감이 도는 벨벳구두를 선물한다. 구두를 신는 과정을 연출하는 섬세한 호흡이 놀랍다. 붉은 스트랩이 이중나선형태로 발목선을 따라가며 구속한다. 이리스는 원장에게 마술처럼 끌리고 점점 그를 탐닉한다. 약지를 잃은 현실의 아픈 그녀를 유일하게 위무하는 공간인 표본실과 원장의 미소. 그리고 또 다른 한 남자. 항구의 하역장에서 일하며 이리스와 같은 모텔공간을 점유하고 사는 남자. 그러나 공간을 점유할 뿐, 시간대는 달라 서로 만날수 없다. 그저 잠을 자고 나간 흔적만을 상상해 볼 뿐. 어느 날 자신이 키우던 새를 잃고 그 뼈를 표본해달라는 한 남자가 찾아온다. 구두수선공인 그는 그녀가 신고 있는 구두를 보고 '구두와 살 사이의 공간이 거의 없다 오랜동안 이 구두를 신으면 안된다" 고 못 경고한다. 영화에서 구두는 표본실 원장에 대한 은유다. 구두는 그녀의 발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밀착되는 어떤 욕망이 된다. 그녀는 그 사랑을 거부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위험한 사랑에 대해 경고하고, 구두를 버리라고 하지만, 끝끝내 구두를 버리지 못한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결말 부분이라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그녀는 영원히 기억되는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과, 표본실에 내려가는 그녀를 한 차례의 빛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것만 알려둔다. 이걸 죽음으로 해석할지, 영원히 사랑을 기억하기 위한 그녀의 노력으로 말해야 할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야 할 듯. 몽환적인 느낌이 강했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색채감각과 영상미가 연신 시선을 끌었다. 마치 색면덩어리를 캔버스에 던지며 그림을 완성해가는 화가의 느낌처럼, 색채의 변화에 따라, 극 속 인물들의 상황과 심리가 변화한다.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은 수천가지일거다. 영화처럼 표본을 만들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 혹은 그녀의 모든 걸 사모아 박물관의 한 구석을 차지하기도 한다. 혹은 평생은 검정색 옷을 입으며, 연인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사람이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랑속에 있다. 사랑은 역동적인 힘의 장일 뿐, 인간이 그 속에 던져진채, 어떤 쪽으로 흘러가야 할지 모르는 주사위와 같은 운명인거다. 채워질 수 있는 사랑이 없듯, 욕망이 끊임없이 다른 대상으로 이전되고 차연되어 또 다른 욕망을 낳는 것은 바로 사랑이 가진 내밀한 운명이다. 그 운명에 젖은 이들에게 탈출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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