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좋은 날엔 비가 온다
이틀째 약간 푸른 우울함이 내 몸 속 구석구석을 엄습했다. 하는 일들이 잘 풀리지 않는 탓이기도 하고, 올해 초 너무 집필에 욕심을 낸 탓에 많은 계약을 맺었지만, 어느 것 하나 집중한 결과를 보여주지 못한 내 자신에 대한 회한이 겹쳤다.
비오는 거리를 쓸쓸하게 걸었다. 허진호 감독의 '호우시절'을 보는 시간, 마음속에 다시 봄이 찾아왔다. 나는 개인적으로 허진호 감독에 대한 믿음이 큰 편이다. 97년 말 우연하게 인턴으로 들어가 일하게 된 곳이 '우노필름'이라고 지금의 사이더스란 영화사다.
이때 조감독을 하고 있던 봉준호 감독님(당시 모텔 선인장이란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때도 정우성씨가 나왔다)을 봤고, 두번째로 스테프를 도와 열심히 홍보자료를 만들던 그때, '8월의 크리스마스'란 영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파란 하늘 바탕에 눈이 내리던 포스터 비주얼을둘러싸고 투표를 하던 그때도 기억난다.
당시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이었던 '8월의 크리스마스'를 찍기 위해 군산촬영소까지 내려가 현장구경을 했다. 3톤의 소금을 뿌렸다고 했다. 당시 최고의 배우였던 한석규와 심은하를 직접 본다는 즐거움도 컸고,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꼼꼼히 보고 싶었던 내겐 참 그 자체로 행복했던 시절이다.
지금 이 맘 때 쯤이었나 낙엽 지던 옛 서울예전, 남산거리에서 촬영 막바지, 허름한 분식집에서 한석규씨와 당시 조연출이었던 박흥식 감독, 조민환 프로듀서 같은 형들과 같이 라면을 먹었다. 당대 최고의 배우를 본다는 마음에 라면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구분이 안되던 때다.
이후 허진호 감독의 영화는 다 봤다. <봄날은 간다>와 <외출> <행복>에 이어 그는 5번째 로맨스을 선보인다. 호우시절은 과거, 그가 보여준 허진호식 로맨스의 영화적 문법에서 이탈했지만, 더욱 견고하고 따뜻하다. 그가 그려낸 사랑의 풍경은 불가능성을 전제로 시작된다. 항상 그랬다. 한번쯤은 짠하게 아팠을 사랑의 기억을, 시간의 앙금이 가라않지 않고 부유하도록 자연스레 놔두는 그의 시선은 '절대적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내겐 버거웠다. 그래도 좋았다.
영화 속 이야기가 내 안에 있는 정서와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낼 때 우리는 영화에 몰입한다. 이때 인간은 영화 속 세상을 비현실인 것을 알면서도, 잠시 불신을 보류한 채, 그 속에 빠져든다. 예전 유학시절을 떠올리며 주인공의 이야기와 나를 동일시 하는 것. 이또한 강력한 흡인의 원칙일 터. 영화 '호우시절'의 스토리는 진부하다. 그런데 그 진부함이 눅진하게 밴 과거의 기억을 연결시키는 고리가 된다. 건설회사 팀장인 동하는 출장 첫날, 우연하게 들른 두보초당에서 유학시절 친구인 메이를 만난다. 과거 서로에게 끌렸던 이들, 키스를 하고 동하가 준 노랑색 자전거를 타며 보낸 과거의 시간을 떠올린다. 사랑은 마치 여우비처럼 봄날의 한적한 무늬를 채우는 작은 여백이었을까? 그렇게 스쳐간 사랑의 미향을 다시 피우는 이들에겐 어떤 일이 기다릴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부랴부랴 두보 시선집을 다시 읽었다. 예전 출장길에 하루의 여유를 두어 가봤던 두보초당. 한국의 소쇄원이 주변의 풍광을 지배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향해 열린 창이라면, 이 두보초당은 청색기운이 완연한 대나무와 연못, 노을이 질때면 물빛에 어린 아도비빛깔의 노목으로 지은 건물이 하나가 되어, 시인을 위한 닫힌 소우주를 이룬다. 닫힌 공간이지만 답답하지 않은 그곳에, 지난날 봄비의 흔적을 모아 푸른 누룩진 사랑의 무늬를 그린다. 영화 속 메이와 동하의 지나간 사랑을 복원하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장소로 안성맞춤이지 싶다.
두보의 시 ‘춘야희우’의 첫 구절 ‘호우지시절’ (好雨知時節), ‘좋은 비는 내릴 때를 알고 내린다’ 는 구절이 영화 전반의 이야기를 이끄는 지배적 메타포다. 참 공감가는 싯구다. 정치적 환멸, 시대와의 불우한 관계를 지속했던 두보가 긍정의 끄덕임으로 자연 앞에 목례하며 지은 이 한 구절의 시. 여기엔 지나간 사랑을 찾고 싶은 이들의 해 맑은 긍정항이 아스라히 포진한다.
유학시절, 한국친구들 몰래 친하게 지냈던 중국친구가 떠올랐다. 이 친구 이름도 메이였는데. 그러고 보니 흔한 이름인건가? 이 친구가 보낸 이메일함을 오랜만에 열었다. 컴퓨터그래픽 회사에서 수석 디자인 팀장으로 일하는 이 녀석과 나는 세살 터울이 진다. 작년에도 사실 주말을 낀 출장길에 들러 같이 밥을 먹었다. 내 친구는 영화 속 고원원같은 사천미인은 절대 아니지만 미소년같은 느낌의 친구라서, 격의 없이 잘 어울려 다녔다. 중국도 요즘은 인정받으려면 죽어라 일을 해야 하는 건지. 이 녀석 아직도 골드미스로 찬연하게 잘 살고 있다. 만화주인공 같은 행동을 잘해서 특히 내 사랑을 받았다. 이 녀석 툭하면 요즘도 이메일을 자주 보낸다. '놀러오라고'......
허진호식 멜로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건 이번이 처음일거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건지. 누가 뭐래도 난 사랑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좋다. 가슴을 쨍하게 하느라, 겨우 새살이 돋아난 생채기를 다시 한번 후벼파는 애잔함. 세월이 가면서 왠지 자꾸 싫다. 사랑이 식은 자리가 따스하게 덥혀지려면, 얼마나 많은 냉소의 기운을 빼내야 하는가? 끝 모를 거대한 상처의 뿌리와 아픔을 삭혀보려, 허진호는 항상 사랑이란 영혼의 부황을 떴다. 부황자리가 가라앉을 때쯤, 사랑은 또 저만치의 세계로 물러나고, 기존의 리듬을 회복할 뿐. 결국 아픈 자리로 몸져 눕는 건, 사랑의 현실 속에 몸 앓이를 했던 인간들이다. 인간이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사랑 속에 있을 뿐이라고 허진호는 얼마나 우리에게 말을 걸었던가 말이다.
그러던 그가 냉소의 지점에, 따스한 사랑의 치유를 세겨넣다니 나로선 기쁠 뿐이다. 고원원이란 배우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예전 날카롭던 턱선 대신 조금은 부드러워진 정우성도 싫지 않았다.
예전엔 사랑인 줄 몰랐지만, 먼 시간이 지난 후, 지난 밤 내린 봄비에, 초록이 싱그럽게 영글어가듯, 새롭게 시작된 사랑을 축복하는 봄비가 그냥 고맙다. 영화 속 시인이 되고 싶었던 동하는, 어떻게 될까? 두보초당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그. 연두와 파랑빛이 섞인 대나무 숲 사이로 시원한 미풍이 분다. 그녀를 만나면, 생의 무게 속에 잊어야 했던 한 줄의 시를 쓰게 될 것인가? 난 그게 궁금하다.
두보초당에 다시 한번 가고 싶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 잔 에뷔테른처럼 긴 목을 가진 시인 두보의 청동상도 떠오른다. 중국은 자연을 그대로 복제해서 내 생의 주변부에 옮겨놓는다는 철학을 유지했다. 한국과 일본 중국 모두 탑파와 정원술에 있어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완성한 터라, 어떤 것이 좋다라는 가치 판단은 곤란하다.
이 영화 속 사랑의 문법은 극중 대사만큼, 사랑에는 '국경'이 있더라는 주장을 정면으로 넘는다. 바로 두보초당은 포월(껴안음과 넘어섬)을 위한 작은 완성체다. 그 속에서 사랑의 꿈을 꾸는 이들이, 자신의 장벽을 넘어서는 방식은 마치 한중일의 정원 양식만큼이나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두보초당에서 시인은 그저 아름답고 긍정의 푸른 기운이 가득도는 한 구절의 시를 썼다. 이 시는 작품의 모든 결론을 대신한다.
"봄 밤의 반가운 비여, 좋은 비는 때와 철을 알아서 내림으로 만물을 피어나게 한다. 바람을 타고 조용히 밤늦도록 내리는 봄 비, 모든 것을 적시지만 가늘어 소리도 없네. 비는 들녘 지름길에서 구름과 함께 검고 강에 뜬 배엔 등불만이 홀로 밝도다. 새벽에 붉게 물든 곳 바라보니 꽃은 비에 젖고 금관성에는 꽃만 무성하네" 늦게 찾아온 만춘의 사랑, 바람을 타고 조용히 내리느라, 언제 내 곁에 왔는지 너무나 작은 빗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했을, 영화 속 연인들이 아름답다. 늦가을, 지나간 봄비같은 사랑을 기억하고 싶다면, 호우시절에 젖어볼 것.
"나는 사랑하고 있는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한다. 다른 일 때문에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중에서
'Art Holic > 영화에 홀리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 잃은 상처를 달래는 법-영화'아르헨티나 할머니'리뷰 (0) | 2009.11.05 |
---|---|
나를 대리할 자 누구인가-영화 써로게이트 리뷰 (0) | 2009.10.15 |
바다를 소유하는 방법-영화'벨라'리뷰 (0) | 2009.10.02 |
사랑을 기억하는 독특한 방식-영화 '약지의 표본' (0) | 2009.10.01 |
연애편지에 담아야 할 것들-영화'미래를 걷는 소녀' 리뷰 (0) | 2009.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