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시간
개인적으로 하루키를 좋아한다. 그러나 광적이진 않다. 깔끔하게 마장된 도시 속 호텔의 갓 세척해 부랴부랴 끼워놓은 베겟향기가 그의 글에선 풍겨난다. <상실의 시대>를 비롯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양을 쫒는 모험><태엽감는 새><렉싱턴의 유령>에 이르기까지, 그의 글에선 도무지 일본 작가의 느낌을 찾을 수 없다.
하긴 그래서 가장 글로벌한 기준의 일본현대작가란 평이 붙어다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키를 읽으면 기억 한편에 곱게 접어주었던 아픈 집적의 무늬가 파삭파삭, 파편이 되어 부서져내린다. 읽고 나면 후회도 많이 했는데, 그러면서도 습관적으로 그의 텍스트를 찾는 건, 내 안에 어떤 공통분모가 그의 글 속에 숨겨져 있는 정신성과 만나기 때문일거다.
오늘 이치가와 준 감독이 연출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토니 타키타니>를 봤다. 영화폴더에 글을 쓰지 않는 건, 영화 속 주인공의 아내가 걸렸던 바로 중독증세, 패션중독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다. 패션은 집단중독의 힘을 매개로 시작되고 마무리 된다.
우리는 왜 옷에 중독될까? 이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간간히 하루키적인 단답형 대답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외로움의 정서가 지배적이다. 고독과 중독, 결국 이 두음절의 단어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분모는 바로 독이다. 외로움도 독이고 특정 사물의 수집에 열을 올리는 것도 결국은 독이 되어 돌아온다. 왜 그들은 독을 스스로 주입하는 걸까?
이 영화를 보면서 소설 속 이미지와 영화로 옮겨진 이미지의 상이성이나 줄거리의 전개, 미장센의 영상미를 일일이 따져묻는 건 내가 아니라도 많은 비평가들의 글이 인터넷에 있으니 그냥 넘어갈란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영화의 시작은 태평양 전쟁 시절, 징집을 피해 그저 재즈음악에 심취해 트롬본을 부는 주인공의 아버지를 꼼꼼하게 설명하는데 할애한다. 아버지는 항상 세상을 떠돌아다녔고 어린시절 모래로 배를 쌓던 아이는 '혼자있는 시간'이 몸에 각인된 인간으로 성장한다.
소년은 그림을 잘 그렸다. 그렇게 미대를 가고 70년대 학생운동과 더불어, 사회적 저항의 목소리가 캠퍼스의 기저를 구성하던 그때에도 소년은 그저 기계를 그리는 일을 즐기고, 철저하게 자기만의 세상속에 파묻혀 산다. 그러던 어느날 출판사에 인턴으로 들어온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눈길이 간다. 에이코(미야자와 리에)는 기계적 논리와 완벽한 선의 움직임을 좋아하는 이 남자의 시선을 장악한다.
외로움의 끝에서 남자는 여자를 만난다. 패셔너블한 여자, '옷을 참 잘 입는 여자'를 만난 셈이다. 그렇다고 가정을 소홀히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옷을 왜 자꾸 사느냐는 말에,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 옷을 산다고만 할뿐. 고독과 중독은 동전의 양면처럼, 이 두사람의 관계설정을 설명하는 열쇠말이다.
새로운 걸 보면 사고 싶은 그녀, 방 하나를 채운 옷과 구두는 731벌. 과히 중독에 가까운 그녀의 행동에 남자는 한 마디 충고를 던진다. 그녀는 충고를 지키고 싶어 노력한다. 그러나 결국 환불한 옷을 되찾기 위해 돌아가다 사고로 죽는다. 결혼 초, 남자는 아침이 되면 여자가 사라질까 만져보기도 하고, 그렇게 독한 외로움 속에 살아온 밀봉된 세계속으로 들어와, 행복을 알려준 그녀가 세상에 없다니. 이제는 죽음을 잊기 위해 그림자를 만들어야 할 때일까? 그는 특이한 모집공고를 낸다. 자신의 아내와 사이즈가 같은 비서를 구하는 것.
아내의 치수와 꼭 맞는 여자를 구해, 아내의 옷을 입고 출근하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모든 옷을 중고상에 팔아버린다. 그는 다시 고독속으로 침잠한다. 패션중독의 흔적, 잔여물이 된 아내의 옷에 대한 그의 몽상은 가히 놀랍다. 옷은 입는 행위, 착용을 통해서만 그 기능적, 심미적 임무를 완수한다. 옷장에 걸린 옷은 화석화된 기억의 산물일 뿐. 그곳엔 따뜻한 기운이 존재하지 않는다.
패션은 모방을 통해 그 유전자를 흘뿌린다.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궁정에서 이루어지던 모방적 복식의 흔적은 의상의 민주화와 더불어 모든 계층, 나이를 불문하고 퍼진다. 언뜻 들으면 멋진 말 같지만, 개인으로선 죽을 맛이다. 그만큼 싸워야 할 적이 많아진 것이다. 문화적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일수록, 시각적 포화도가 높을수록, 패션 중독은 심해진다. 차별화의 욕구가 점점 더 세밀하게 조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글에 한국독자들이 끌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전후 4년째 태어난 그는 집중적인 고도 성장의 시대를 살았던 작가다. 소비주의의 창궐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며 산 세대. 그러나 인간과 인간의 촘촘한 연대가 깨어지기 시작하고, 로맨스는 '쿨'한 사랑으로 대체되던 세대, 바로 이런 도시적 미감 속에서 부유하는 인간의 모습은 지금 386세대와 닮아있다. 물론 하루키 글의 무국적성은 지금 글로벌리즘에 내몰린 아이들의 정서와도 잘 통한다. 그의 글 속에 등장하는 옷의 양상이 부유하는 인간의 기표가 된 것은 같은 이유다.
하루키는 옷에 대한 묘사를 잘 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옷을 통해 누적된 고독의 흔적을 말하는 데는 익숙하지 싶다. 이번 토니 타키타니에서 아내의 모습은 <태엽감는 새>에서 오랜시간 힘들게 모은 옷을 놔두고 가출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옷은 기억이다. 선캄브리아 시대의 화석처럼, 수억의 시간이 흘러도, 각인된 상처의 유전자가 혈흔으로 남듯, 인간의 몸에 각인되고 새겨진다.
S#2 패션 중독과 싸우는 법
소설 속 에이코의 모습은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옷을 소비하는 외로운 인간의 정형이지만, 심리적으로 보면 '중독증세'가 분명하다. 고독은 화려한 이브닝 드레스라지만, 재정적 혼란까지 초래하는 과다한 패션중독은 분명 치료감이다. 그러니 미화하지 말 것. 허전함을 메우려는 이러한 쇼핑홀릭은 그것이 우울에 근거하든, 혹은 조증에 근거하든, 우울증 치료약을 먹거나, 기분조절약물을 통해 치료가 가능하다. 흔히 심리학자들은 '지름신'을 강박장애로 분류하는 데 이 경우는 행동치료를 같이 받아야 한다.
그러나 영화 속 주인공처럼 강박증이 강한 사람은 소수다. 그만큼 대부분이 쇼핑에 탐닉은 하지만, 병적인 것으로 설명되기엔 무리가 되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해도 안심하지 말것. 뭐든 초기에 잡는게 중요하다. 인지심리학 전문가들이 흔히 이 경우 사용하는 것이 탈맥락화 치료법이다 탈맥락화(De-contextualization)는 쇼핑과 다른 사회적 맥락속에 나를 던지는 일이다. 쇼핑대신 운동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하거나, 여행을 가도 좋다. 두번째로 지름신을 꺽는 최고의 비법은 단순한 종이 한장에 있다. 바로 쇼핑 리스트를 정리하는 것. 내가 사야할 것들을 미리 꼼꼼하게 정리해 이것만 구매하는 버릇을 들여놓는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실험에 따르면 한장의 종이가 발휘하는 힘이 매우 크다.
아내가 없는 빈 공간. 한때 옷으로 가득했던 이 공간속에 한 남자가 외롭게 누워있다. 그는 옷을 팔아버린다. 내가 보기엔 가장 좋은 선택이 아닐까? 옷은 기억의 매개물이다. 내 옷장 속을 들여다 볼때마다, 누군가를 만났던 첫번째 기억이 되살아나고, 벙어리 장갑을 보면서 의외로 소심쟁이인 내 자신의 푸른 자화상을 발견한다. 그걸 극복하고 싶어서 내가 한 일은 소품들을 정리해 선물로 준 것이다. 디자이너 친구가 리폼해서 쓸 것은 쓰고 나머지는 나눠 입었다. 누가 뭐래도 하루키가 무서운건, 옷 속에 담긴 기억의 힘을 너무나 강렬하게 설명해낸 일이다. 그러니 중독될 수 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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