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봉_이하리의 빛-1_캔버스에 혼합재료_162.1×130cm_2008
가을의 속살이 드러나는 시간. 통의동에 있는 작은 플라워카페에서 기자를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3시부터 시작한 인터뷰는 2시간 동안 커피를 두 번 채우고, 사진기자의 재치있는 공감아래 사진을 찍습니다.촬영을 위해 질러버린 옅은 인디고 블루빛 점퍼와 차콜 그레이탑, 청바지의 손 봉재선에 엄지손가락을 찔러넣습니다. 가을 하늘 맑던 날, 오후의 햇살에 어루숭한 가벼움이 내 검지와 약지, 손등위로 살포시 내려앉습니다. 가을은 가난해진 손가락 사이를 지나갑니다.
집에 돌아오는 시간, 한편의 詩를 읽고 싶다는 생각에, 정일근님의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란 시집을 샀습니다. 대학 1학년부터 사 모은 내 서재에 꽂힌 200여권의 시집. 그 속에서 만난 '감성의 연금술'은 내 속살에 밴 상처를 치유했습니다. 시집은 곰삭여 읽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화가가 캔버스에 앉아 작업한 시간만큼 한편의 그림을 봐야 한다는 미학자의 충고는 유효합니다. 누군가 그린, 혹은 쓴, 녹여내고 용접하고 압력으로 찍어낸, 빛을 조려낸 것들은 아름답습니다.
화가 배수봉이 그린 고향 안동의 햇살속에 익어가는 고추의 힘은 가을의 연금술을 보여주는 작은 증거입니다. 시집의 뒤켠, 시인이 써놓은 마지막 글을 인용합니다. "사람에게 적막은 왼쪽 가슴에 있는 제 심장 소리를 듣는 일이다. 그 소리가 무엇을 향해 뛰는지 알게 되는 일이다. 은현리에서 내 시는 내 심장소리다. 오직 그 사람을 향해 뛰는 심장 소리다. 내 심장 소리를 귀 열고 따뜻하게 들어주는 세상을 기다리고 싶다"라고요. 나는 이 작은 도시의 누옥에 앉아 어떤 글을 썼는지 지나가는 가을에 물어야겠습니다. 한동안 블로그를 쉬는 것도 좋겠지요.
붉은 고추처럼 영글지 못한 문장을, 한줄의 단아한 시를 써내지 못하는 것은 욕심때문입니다. 지금도 써야 할 4권의 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속도에 제동을 걸지 못한 채, 글을 쓴 터라, 글 한줄 한줄에, 인이박힌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글을 쓰면서 울고 웃고 치유받지 못하며, 수사학에 의존해 쓰는 글은 곧 힘을 잃어버리기 마련입니다. 가을입니다. 독서의 계절이라고 불리지만, 출판계에선 가장 책이 팔리지 않는 아이러니의 계절이기도 하죠. 가을의 연금술이 제 글에 필요할 때입니다. 한줄의 빛나는 글을 쓰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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