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우리는 왜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해야 하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지도 이제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그가 마지막 삶의 촛불을 켰던 봉하마을엔 조문객이 끊어지지 않고 있고, 그의 서거를 둘러싼 정치적 공방도 지속된다. 나는 흔히 말하는 노빠도 아니고 생전 그의 정치철학을 철썩같이 믿었던 지지자는 아니다. 그러나 참 슬펐다. 오래도 울었지 싶다.
이제 다시 현실의 자리에 섰다.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이제 그는 없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나. 현 정권은 추모정국이라 부르며, 추모하는 우리를 일종의 범죄자 취급하고 추모제를 일종의 정치적 행사라고 막는다. 맞다 추모제는 정치적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정치적이란 말은 우리들에게 의미를 가져다주는 사건이란 뜻일거다.
그의 죽음 이후의 삶을 위해 몇 권의 책을 사서 닥치는 대로 읽었다. 주디스 버틀러의 <불확실한 삶>과 세계적인 정치학자인 안토니오 네그리의 <다중>이다. 쉬운 책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둘러싼 우리시대의 풍경을 짚어주고, 그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익혀야 할 것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알게 해주었다.
주디스 버틀러는 그의 책에서 말한다. "슬픔은 정치 공동체의 복잡한 수준의 느낌을 제공하고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성과 윤리적 책임감을 강조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통해, 우리 안에 있는 그 어떤것, 뭉클한 것이 되살아나는 걸 경험한다. 그건 뭘까? 바로 '관계성'이다. 슬픔이 개인 각자의 몫이 아닌, 타인들에게 걸쳐서 일어나는 감정인 것을 배운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도 어찌 하지 못하는 신 자유주의에 편승한 제국의 폭력.
우리는 애도를 통해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느낌과 물리적 삶에 대한 공동의 책임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갖게 된다. 미국사회를 강타했던 9.11 망자들을 향한 애도의 시간에, 부시는 단연코 입을 놀렸다. "애도를 끝내고 이제는 단호히 행동해야 할 시간"이라고. 어째 부시와 현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은 많은 부분을 닮았다. 소름 끼치도록. 9.11과 북핵위기가 왜 이렇게 오버랩 되는가는 각자의 해석에 맡긴다. 앞에서 말했듯 애도는 사적 행위가 아닌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행위다. 우리는 애도를 통해 삶의 취약성과 의존성을 확인해야 한다. 지금은 MB나 부시의 말처럼 단호한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 아니다.
S#2 죽은 자는 산자의 기억 속에서 신화가 된다
바로 신자유주의란 담론 속에 포섭된 우리 사회의 면모들을 바로보고, 사유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둘러싸고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단면은 바로 '애도해야 할 사람과 애도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구분'하는 사회철학이 너무나도 커졌다는 것이다. 신 자유주의의 씨앗이 이렇게 우리의 삶을 식민화하는 현실은 슬프지만 엄정한 현실이다. 결국 죽음과 그 죽음을 둘러싼 애도의 제의또한 서열화 되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추모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바로 삶이 부인된 사람. 노무현이다. 아니 그뿐만이 아닌 신자유주의에서 하루하루 버텨야 하는 우리들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철저하게 폄하하려는 세력이 공적 애도를 금하는 명령을 내리는 것은, 이러한 추모의 제의를 통해 우리가 깨어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는 신 자유주의의 십자포화 속에 놓인 불확실한 우리의 삷을 바꾸어야 하는 윤리적 책임을 알려준 사건이다. 우리가 수천개의 실가닥으로 연결된 실체이듯, 관계성으로 묶여 있음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민주주의가 초래한 위기를 바라보게 되었다. 인터넷 검열과 공중파 방송국의 사유화, 소셜 엔터테이너들의 방송 프로그램 접근 배제. 바로 이것이 어제 한승무 국무총리가 외신들을 놓고 주장한 "MB 정권은 민주주의 정권"의 실체다. 바로 민주주의의 위기가 우리의 손으로 선출한 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현실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긍정의 목소리도 들린다. 2020년쯤엔 대의제 민주주의가 없어진다고 말한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지배와 신 자유주의의 폭력에 맞서 도처에서 저항한다. 전 지구적 혁명의 시대에 돌입했다고 정치학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말한다. 그는 지금 제국의 힘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동시다발적으로 저항하는 다중(Multitude)라고 말한다. 이제 노동은 단순하게 생산품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다. 협력과 소통을 생산하고 네크워크화 되어 있어 그 속에서 혁신한다. 촛불의 동력이 다했다고 낙담할 이유가 없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천주고 정의구현 사제단은 촛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흥겨울수록 승리가 가깝습니다. 신명의 크기가 승리의 크기를 결정합니다." 라고. 바로 안토니오 네그리는 다중의 잠재된 능력, 활력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자본에 의해 끊임없이 포섭되어 죽은 것이 되지만 결코 죽지 않는, 이 다중의 잠재력이 활력으로 솟아나는 과정이며 그 결과라고. 이것이 바로 절대적 민주주의라고 말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요구한다고 표현해서는 안된다. 요구가 아닌 주장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촛불은 이미 켜져있다. 그 촛불의 진화가능성을 모르는 건 오로지 청와대와 수장의 곁에 있는 아부꾼들 밖엔 없다. 이젠 새로운 싸움의 시작이다. 나 또한 무장할 것이다. 우리의 무장은 단순하게 촛불을 들고 서울광장에 모이는 것이 아니다. 저항하는 주체 또한 진화한다는 걸 보여줄 시간이다. 당신들 하나하나가 소중한 제다이가 되어 MB제국에 균열을 낼 것이다. 나는 믿는다. 절대적 민주주의의 활력이 바로 우리안에 있는 '포스'임을
포스가 함께 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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