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정든 것들을 떠나보내는 방법-영화 '여름의 조각들' 리뷰

패션 큐레이터 2009. 3. 31. 20:20

 

 

S# 여름-우리들의 찬란한 시절

 

지난 일요일 영화 <여름의 조각들>을 봤습니다. 우리들이 남긴 찬란한 시간이란 영화 포스터의 부제에 끌려 봤던 영화이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며 예전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보낸 시간들을 곰삭여 보기도 하고, 떠올리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가족'을 소재로 하는 많은 영화 중의 하나입니다. 단 가족의 모임과 해체에는 바로 어머니의 죽음과 그녀가 유산으로 남긴 수많은 그림과 조각, 은세공기, 마호가니 고가구와 유리공예 작품이 남겨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 또한 영화 속 어머니역의 엘렌처럼 미술품 컬렉터입니다. 상당수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지만 제 사후에 어떻게 이것들이 어떻게 될지, 또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준 영화 였네요.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프랑스 남부 시골을 연상시키는 풍성한 햇살과 바람, 연초록빛 숲 사이를 아이들이 달려갑니다. 바로 할머니댁 엘렌의 집에 모인 그녀의 세 아이들, 프레데릭과 아드리엔, 제레미의 가족입니다.

 

파리에서 경제학 교수로 생활하고 있는 큰 아들 프레데릭과 뉴욕에 거주하며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딸 아드리엔(줄리엣 비노쉬), 베이징에서 값싼 노임으로 운동화를 생산하는 회사를 운영하는 제레미. 이들은 엄마의 75번째 생일을 맞아 집에 모입니다.

 

그녀의 집은 마치 미술관처럼 엄청난 미술품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카미유 코로의 풍경화와 오딜롱 르동의 몽환적인 그림, 어린시절 아이들이 장난치다 깨뜨린 에드가 드가의 발레소녀 조각,

 

꽃잎의 우아한 곡선에서 모티브를 딴 아르누보 양식의 거장, 루이 마조렐이 디자인한 마호가니 책상과 의자, 클림트와 함께 비엔나 공방에서 분리파 양식의 가구를 디자인한 조셉 호프만의 모던한 수납장, 펠릭스 브라크몽의 보라색 유리공예작품들, 이외에도 덴마크의 절제된 은공예 디자인 미학을 보여주는 조지 젠슨의 식기류등, 정말 눈이 부실 정도지요. 그런 그녀가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가족들은 유품의 처리 문제로 작은 갈등을 표출하게 됩니다. 영화의 스토리는 사실 이것이 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극적 반전은 없습니다.

 

 

극의 나머지는 어머니의 유품으로 받은 그림들과 고가구를 어떻게 할 것인가로 채워집니다. 큰 아들인 프레데릭은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어 세 형제가 나란히 간직하게 되길 바라지만, 베이징에서 사업을 확장하고 싶은 제레미나, 고풍스런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던 딸 아드리엔은 빨리 물건을 팔아 환금할 생각에 빠지죠. 물론 엄청난 상속세를 물기 어려운 탓에, 결국 오르세 미술관에 전량 기증을 하는 것으로 재산 분쟁은 끝이 납니다. 사실 분쟁이라고 할 것도 없지요.

 

 

이 영화는 경제적/개인적 이유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고 방산되는 경우에도, 남게 되는 것, 보관되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형제들의 추억이 고스란히 각인된 미술품과 고가구는 미술관에 그대로 전시됩니다. 이 경우, 그들이 작품 속에서 자라며 얻었던 추억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찬란한 여름의 시간을 채웠던 기억의 조각은 견고한 기억의 저장고인 박물관 속에 대중에게 선보여질 뿐이지요. 프레데릭 부부가 오르세에 전시된 카미유 코로의 그림을 보며, 더 이상 어린시절의 추억을 이야기로 만들어 갈수 없음을, 삶의 터전 속에서 성장해온 미술품의 아우라가 없어지는 상황을 한탄할 뿐입니다.

 

프레데릭이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유품인 그림을 설명해줄 때 마다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합니다. 구식이고 촌스럽다는 것이죠. 프랑스 내의 문화적 자본이 미국화 되어가는 현상, 힙합과 팝문화가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시대, 구석에 걸린 인상주의 그림은 시대에 따라 부각되는 삶의 기호와 공유를 상실한 채, 무거운 짐이 될 뿐입니다. 그렇다고 예전 미술품들이 다 사라져야 할까요? 그건 아닙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기억의 지층이 역동적으로 구축된 결과입니다. 현재의 기억은 미래를 구성하는 힘을 가지며, 언제든 경험의 질료로서 작동합니다. 미술관과 박물관이란 기관이 있는 까닭은 개인의 수집노력을 통해, 지워질수 있는 유산을 기억하고 이를 통해 후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정신적 자산이 무엇이며, 우선순위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물론 미술관에 전시된 어머니의 유품에선 더 이상 개인의 서사와 추억의 흔적을 만들어 갈수 없지만, 누군가는 그 과거의 기억들을 조사할 것이고 그 속에 담겨진 의미들을 모아 새로운 의미의 옷을 만들어 입기도 하겠지요. 영화 속 어머니 엘렌은 폴 베르티에란 가상의 화가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이었죠. 그녀는 남편과 이혼을 한 후 폴과 생의 마지막을 지킵니다. 이제 그녀가 수집했던 미술품은 '회고전'의 형식으로 여러 나라에서 전시될 것이고, 그들의 과거는 다소 윤색되거나 탈색되는 과정도 경험하게 되겠죠.

 

영화를 보면서 원제인 Summer Hours (여름의 시간들) 보다 '여름의 조각들'이란 한국 상영제목이 더 끌렸습니다. 영화의 끝 부분, 오르세 미술관의 전문 복원사가 어린시절 세 형제가 깨뜨린 드가의 조각상을 정교하게 짜맞추어 진품을 복원합니다. 기억은 쪼개어진 조각의 편린처럼 언제든 흩어질수도 있지만, 믿음이란 아교가 있다면, 그 끈적임으로 아팠던 상처의 무늬를 모으듯, 부서진 조각을 모아 예전의 아름다움을 되찾아올 수 있지요. 세 형제에게 다시 집과 그 속에서의 추억을 되살려 주었듯 말입니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난 날은 한편으론 가볍고, 엄마 생각이 나는가 하면, 나는 과연 앞으로 살게 될 내 집을 무엇으로 채우게 될까를 생각하게 되요. 더 큰 사랑, 더 큰 깨달음을 위해 때로는 개인적 추억을 포기해야 할 때가 온다는 걸 배웁니다. 미래에 다가올 세대를 위해, 내가 수집한 물건 하나하나가 나를 대신해 말을 건내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컬렉팅이란 기묘한 수집벽 취미를 더욱 신중하고 책임감있게 수행해야 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오랜만에 따뜻한 모범생 영화 한편을 본 느낌입니다.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떠나보내야 할 때, 개인적 이별을 넘어, 사회적 차원의 가르침과 교훈이 되는 삶,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작은 실뭉치가 되어 많은 이들의 아픔을 기워내 예쁜 조각보 하나 만들어도 좋을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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