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낮술 생각날 때 보는 영화-영화 '낮술' 리뷰

패션 큐레이터 2009. 2. 20. 08:21

 

S#1 낮술 한잔 하실래요?

 

집에 들어오는 길, 모처럼 만에 혜화동에 내렸습니다. 초컬릿 한잔을 마신 후 혜화동에 한군데 밖에 없는 서점에 들렀지요. 이곳은 예술서적을 많이 구비해 놓고 있어서, 항상 갈 때마다 오랜동안 머물게 됩니다. 손때 묻은 예술책에 제 손때가 묻습니다. 우아한 폐곡선의 손놀림 속엔 그림과 영화, 사진에 대한 무의식적인 애정과 포옹이 감겨 돌아갑니다.

 

2월 중순이 훨씬 넘었지만, 겨울 추위는 꺽일줄 모릅니다. 오늘 모피 케이프로 단장한 일이 다행이었지 싶다고 되뇌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주책이지 싶더군요. 스키니진을 입고 브라운 빛깔 워머를 하고 앵클부츠를 신었습니다. 방울달린 비니를 쓴 제 모습엔 30대 중반이란 나이의 제한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종의 곤죽맞음이 녹아 있음을 발견합니다.

 

언제부터인가 혜화동을 별로 가고 싶질 않았습니다. 90년 초반 그래도 대한민국 연극 1번지라 불리던 혜화동은 다양한 종류의 정극이 줄을 이었습니다. <한 여름밤의 꿈>과 같은 세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리타 길들이기>와 같은 발랄한 작품까지, 비록 작품의 호흡은 다소 느릿하지만, 작은 소극장 무대에서 배우들의 발성과 표정을 살펴보는 일은 즐거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혜화동엔 벗기는 연극이 등장해서, 줄줄이 아류작을 양산했고, 이젠 온통 뮤지컬 천국입니다. 소품에 불과한 작품에도 노래 몇가지를 삽입시켜놓고선 뮤지컬이라 호객행위를 합니다. 매형과 함께 예전 대학로 길 소금창고란 허름한 카페에서 '모카'란 이름의 커피를 마시며 신기해했고, 곱창에 소주 몇 잔이면 꽤나 근사한 낭만이 배어나오는 줄 알았던 시절은 이제 지워진지 오래입니다.

 

과거에 매몰되어 사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지만, 결국 과거란 미래를 향해 터있는 영혼의 창과 같아서, 과거의 힘을 빌어 현재를 재구성하니까요. 언 가슴 속 깊이 꼭꼭 박아두었던 흑요석처럼 빛나는 추억의 언어들이 실타래처럼 풀려나는 오늘은 술 한잔 따뜻하게 먹고 싶습니다.

 

 

하이퍼텍 나다에 들러 영화 한편을 봤습니다. 영화 제목도 참 거시기 합니다. <낮술>. 꽤 오랜만에 독립영화 한편을 보는 느낌입니다. 저예산 영화의 매력은 매끄러움 대신 질박한 생의 투석전을 연상시킨다는 것. 그만큼 예쁘게 분칠을 해서 세상에 내놓는 작품이 아니기에, 청량감이 살아있다는 점일 겁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실연당한 소심남 혁진입니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시작된 술자리. 친구들은 술기운에 내일 당장 강원도 정선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의견을 모으지만 다음날, 터미널에 도착한 멤버는 달랑 혁진 뿐. 술에 뻗은 친구들 때문에 시작부터 꼬여버린 혁진의 여행길은 줄기차게 엉겨들어가는 거미줄처럼 그를 옥죄고 돕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배경이었던 정선 버스 정류장. 그곳에 놓여진 기다란 의자 위에 영화 속 주인공처럼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이 많나 봅니다. 친구가 소개했다던 펜션은 찾지도 못한 채, 엉뚱하게 들어간 또 다른 펜션의 옆 방에서 새콤한 느낌의 여인을 만나는 남자. 작업 한번 걸어야 겠다는 심산으로 와인까지 들고가지만, 왠걸 뚱한 표정의 남자가 대신 술을 받아듭니다.

 

 

겨울 경포대에서 라면에 소주만큼 멋진 것은 없다며 찾아간 경포대에서, 자꾸 술을 사달라던 옆방의 유혹녀를 만나 2차 3차 술을 마시러 갑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상상에 맡깁니다. 스토리 구조가 매우 단순한데다 그리 촘촘하지 않기에, 모든 이야기를 다하기란 어려울 듯 합니다. (스포일러가 되면 안되니까요)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매우 코믹합니다. 극의 전개에서 극중 인물의 캐릭터까지, 어벙한 소심남의 대책없는 강원도 정선 오딧세이는 좌충우돌 꼬여만 가지요.

 

 

저 예산  독립영화다 보니 감독 혼자서 스크립트하고 연출하고 조명에 촬영에 편집까지 혼자서 처리하다 보니, 화면은 그리 매끄럽진 않습니다. 포커스 아웃도 남발되어서 화면이 뿌옇습니다.(이것이 극적 효과를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일수도 있겠으나 사실 극의 양상을 돋보이게 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되더군요) 란희란 여인의 등장은 우연성에 근거한 독립영화적인 느낌을 살리지 못한 채(이분 뒤에 크레디트를 보니 조연출을 맡은 분이더군요) 그냥 군더더기 같은 느낌마저 발산합니다.

 

 

코믹하긴 하지만 절제된 매력이 없고, 연기도 거의 신인들이 등장한지라, 참신한 느낌은 있겠지만, 발성에서 표정까지 다소 무리수가 많이 보였습니다. 독립단편영화일수록, 철저하게 절제된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과잉으로 넘친다고 할까요? 좀 아쉬웠습니다. 영화의 스토리가 많은 걸 상쇄하고 탄탄하게 후반부를 떠받쳐 준다는 점은 큰 장점이지만, 디테일에서 많은 걸 놓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봤습니다. 국제 영화제의 수상 경력들을 보니, 꽤 이음새없이 돌아가는 이야기의 힘에 많은 점수를 준 듯 보입니다.

 

 

남자가 거절할 수 없는 두가지가 여자와 술이라고, 감독은 주장합니다. 얼어붙은 실개천 위에서 송어를 구으며 더덕술을 마시고, 남자들의 깊은 속내를 드러내는 수다를 듣습니다. 새해의 시작과 더불어 일이 생각같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속상하고 억울해서 낮술이라도 한잔 걸치고 싶을 때, 한번 쯤 보며 웃어보기엔 안성맞춤인듯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영화 속 주인공도 대학교를 갓 졸업한 백수입니다. 말이 예뻐 아버지의 일을 돕는 것이지 우리 사회에 수없이 양산되고 있는 88만원 세대인 것이죠. (우연이랄건 없겠지만 제 좌석 번호가 나열 38번이었습니다. 하이퍼텍 나다는 모든 좌석에 우리나라의 문화계 인사의 이름을 붙여놓지요. 제가 앉은 자리는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 씨가 적혀 있더군요)

 

마음이 속상하고 뼈아플때, 정말 낮술이라도 거나하게 한잔 해야 하는 걸까요? 꿈을 잃어버린 세대의 상처를 안아주지 못하는 현 정권의 무능한 수권능력에 그저 깊은 아쉬움만 토해낼 뿐입니다. 저기여.......낮술 한잔 하실래요?

 

 

 

41657

 

 


2월 말-3월 초순까지 포스팅할 영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 사랑후에 남는 것들
  • 내 남자의 유통기한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워낭소리
  • 레볼루셔너리 로드
  • 말리와 나
  •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
  • 타이드랜드
  • 쇼퍼홀릭(코스튬 드라마)
  •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
  •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름휴가
  • 유어 프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