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봄을 기다리며......
가장 짧은 달 2월도 이제 하루 남았다. 시간의 흐름은 어찌나 이리도 빠르게 흐르는지, 벤자민 버튼의 시계를 빌려오고 싶은 요즘이다. 거꾸로 가는 시간의 힘을 가질수 있다면 좋겠다. 아니 소망한다.
스콧 피츠 제럴드의 단편집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하나하나 꼼꼼히 읽었다. 1920년대의 유행이 다시 복원되는 요즘, 인간의 역사 중 가장 화려했다는, 그래서 너무나도 짧았던 아름 다운 시절. 1920년대 플래퍼 시대의 패션과 문학에 빠져 있다. 피츠 제럴드는 정말 글을 잘 쓴다.
멋진 시계를 사기 위해 썼다는 단편도 있고, 가치관이 뒤집어져, 세대간 갈등이 심했던 시대의 모습을 담는 단편도 있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표지를 장식한 존 헬드 주니어의 일러스트는 눈길을 끌었다. 당시 유행한 찰스턴이란 춤을 추는 남녀의 모습.
긴머리에 풍성한 스커트 실루엣은 전쟁을 겪으며 짧은 보브 스타일의 머리에 코르셋을 벗어던져 전체적으로 원통형 실루엣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이 책의 곳곳에 등장한다.
어제 오후엔 메이저급 출판사 편집자를 만나 새롭게 집필할 책의 컨셉을 잡고 계획을 구두로 프레젠테이션 해주었다.
오늘까지 세번째 책의 기획안을 완성해서 보내야 한다. 내 전공분야를 미술과 패션에 접목해 쓰는 일임에도 가장 두렵다 그래서 고치고 또 고쳤다. 배운게 도둑질이라는데, 자칭 배웠다고, 안다고 자부하는 지식의 체계나 경험이 가장 서술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요즘 그 어려움 을 한없이 경험하고 있다. 글쓰기는 경험 너머의 세계를 향한다. 갤러리에 들렀다.
아직 개나리가 피어나진 않았지만 인공조화로 만들어놓은 카페옆길이 눈에 들어와서 한컷 찍었다. 문득 길을 걷다가 삼청동길 담벼락에 녹황빛 세월의 때가 낀 수도관이 보였다. 밝은 노랑색으로 채색을 했지만 시간속에 부식된 표면위를 감싸고 도는 나무 덩쿨과 짙은 브라운 빛깔의 벽돌 담벽이 어우러져 있다.
S#2 책은 오래된 스웨터와 같은 것
우리가 흔히 배우고 익히는 지식이란 것도, 사진 속 수도관과 다를 바 없다. 소통을 위해 흘러야 하고, 유통되고 그 속에서 비판을 받고, 새로운 논리를 무장하고, 게우고, 채우며 풍성해진다. 비록 세월의 힘 앞에서 초기에 공부를 통해 얻은 학위 속 지식의 껍질은 속살을 드러내며, 밑천을 드러내지만, 주변의 풍광과 어울려 더욱 창연해진다. 지식의 숲을 거닐기 위해, 난 항상 두 종류의 책을 끼고 걷는다. 내가 좋아하는 미술과 패션에 관한 책, 그리고 그 주제와 더불어 입을 수 있는 다른 테마의 책들을 고른다. 마치 지식도 레이어드룩처럼 겹쳐 입을 때 더욱 따스하고 멋이 살아나는 것 같다. 책을 읽는 일은 마치 옷을 입는 일에 비유할 수 있지 않나 싶다. 클래식한 수트를 갖춰 오랜동안 입어야 할 때가 있고 한 시즌 유행하는 소품을 갖추어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
『하하 미술관』의 첫번째 장을 장식했던 박재영의 올 그림을 떠올렸다. 오랜 니트 스웨터는 늘어지는 맛이 있어 좋고, 따스한 공기를 감싸는 함기성이 더욱 좋아진다는 것. 그것이 세월이 옷에 대해 부여하는 선물이라고 말했었다. 지식도 그렇고 책을 읽는 일도 그렇다. 요즘은 대화할 때 책 이야기를 하면 자꾸 저자의 이름을 까먹는다. 책의 자질구레한 팩트들도 잊어먹기 일쑤다. 그저 떠오르는 건 책의 큰 얼개와 구조, 메세지 정도다. 그런데 까먹을수록 책 속의 명문들이 스웨터처럼 나를 감싸고 돈다. 경험을 통해 용해된 시선은 문장과 만나 드디어 결혼을 한다.
이번달 많은 책을 구매했다. 이제 서재를 확장하기 어려워 어떻게 버텨야 할까 고민도 하지만 그래도 책을 채울때마다 기분이 좋다. 나는 복식사와 패션, 화장품과 헤어스타일링의 역사에 관한 책들은 빼놓지 않고 모은다. 에스터 로더와 엘리자베스 아덴, 헬레나 루빈스타인.....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나? 그렇다 바로 세계적인 화장품 기업의 초기사를 인물을 통해 풀어낸 책을 샀다. 제목은 <아름다움의 제국>이다. 호주에서 정착민들을 상대로 엄마가 만들어준 로션과 연고를 팔던 헬레나 루빈스타인에서 경쟁자였던 아덴의 경영기법까지 다양한 내용을 다루었다.
두번째로는 이미 라디오 방송에서 소개했던 도서관 고양이 듀이의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갤리온 출판사는 에세이를 참 잘 낸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산책이란 출판사의 에세이집도 자주 읽는다. 읽다보면 어느 출판사가 어떤 장르에 강하고 어떤 부분을 잘 하는지 조금씩은 배운다. 인문학을 좋아하는 관계로 한길사의 그레이트 북스는 컬렉팅을 하고 있다. 뿌리와 이파리란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도 좋아한다. 여기는 참 특이하고 이곳이 아니면 출간 자체가 어려운 그런 소중한 인문학 책을 많이 낸다. 휴머니스트란 출판사는 내가 좋아하는 인문학적 미술책을 종종 낸다.
『스타일 중독자』란 책이 나왔다. 원래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마크 턴 게이트가 쓴 책인데, 패션 브랜드의 역사와 그 뒷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초기 스타일의 전쟁을 둘러싼 파리 패션의 역사를 살펴보기에 참 좋다. 원래 번역을 의뢰받았던 책이었는데, 시간이 없어 뒤로 미루어두었었다. 내가 번역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번역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몇개의 오자와 깨끗하지 않은 문장을 발견해 출판사에 알려주려고 한다)
이번달 구매한 책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고 있는 <스캔들 미술사>그런데 실제로는 제목장사를 한 티가 좀 나는 책이다. 스캔들이라길래 뭐지 하고 읽었는데, 그냥 그림 속에 담겨진 작은 소품들, 이야기들을 주로 정리한 책이다. 그래도 흥미가 끌리는 것은 미술작품도 결국은 이야기의 확장이란 점,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을 지적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렘브란트의 그림 속 해부학 수업 그림의 환자의 정체를 알게 된 건 큰 수확이다. 이 내용은 다음에 다른 포스팅을 통해 자세히 다룰 것이다. <유혹의 역사>는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발전시켜온 많은 패션의 소품들, 금발의 기술과 하이힐의 역사, 인공유방의 유래등과 같은 흥미로운 내용을 다룬다.
이번 아마존을 통해 구매한 4권의 책이 있다. 복식사가 힐다 암플렛의 <모자의 역사>와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의 패션 부문 큐레이터가 서술한 <레이스> 그리고 패션 큐레이터 크리스 타운젠트의 Rapture란 책이 있다. 뭔가 하고 봤더니 미술과 패션의 협업과정과 그 진화에 대해서 참 흥미롭게 써놓았다. 우리나라엔 왜 이런 책이 없을까? 항상 심사가 뒤틀린다. 의상학과는 그렇게도 많은데, 어찌 학자들은 이렇게 책을 쓰는 일에 무관심한 것인지. 하긴 이야기를 들어보니 단행본을 쓰는데 들이는 노력으로 논문을 쓰는것이 점수를 더 높게 받는 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복식학회에서 나오는 논문을 들춰봐도 인용할 만한 내용이 별로 없다는 건 좀 아쉽다. 논문의 수준이 낮다보니, 툭하면 외국의 복식사 관련 논문들을 비싼 값을 주고 다운 받아야 한다.
<레이스>는 정말 뛰어난 소장가치가 있는 책이었다. 처음엔 화려한 레이스 도록만 있고 글이 많지 않아서 서운했는데 앞에 도입부분에 25페이지 가량의 축약된 레이스의 역사가 아주 읽을만 했다. 책을 읽다가 아무래도 심도깊은 문헌을 더 봐야겠다는 생각에 주문한 책이 영국의 복식전문가 샌티나 레비의 A Lace History 란 책이다. 자수와 레이스의 역사 전문가인 그녀는 16세기 초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의 고급의상의 액세서리였던 레이스의 종류와 형태에 대해 꼼꼼히 설명을 했다. 150불이란 만만치 않은 가격에, 더구나 요즘은 환율이 올라서 책을 살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드를 휙! 책이 도착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외에도 19세기 유명한 패션 일러스트레이터가 남긴 작업을 결합해 복식사로 정리한 책이 있다. 아주 흥미롭게 읽고 있다. 기사 복식을 4가지 종류로 나뉘어 설명한 부분을 읽으며 새로운 사실을 배웠다. 사람들은 옷의 역사가 뭐 그리 대단한가? 하고 묻기도 한다. 그런데 어쩌라. 공부하면 할수록 엄청나게 지평이 넓어진다. 그래서 책도 무진장 사야 하고 참 무섭기까지 한다. 그래도 좋은 걸 어쩌라. 미드보다도 막장 드라마 보다도 더 재미있는 것이 이 패션에 관한 책을 읽고 정리하는 일이거늘......다 타고난 팔자대로 사나보다.
요즘은 책도 신중하게 구매하는 고관여 상품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그만큼 책이 선택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세상이란 뜻이다. 이런 시대에 저자들은 과연 어떻게 세상과 조우하고 만나야 하는것일까. 책을 읽는 즐거움을 주는 책. 그 즐거움의 본질을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 더욱 보수적인 성향의 독자들이 늘어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정말 필요한 책이 아니면 선택되기 어려운 시대. 그래도 살아야지 하는 마음에, 오늘도 퇴근길 서점에 들러 또 연구를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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