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의사는 달리기가 생명이다-영화 '간장선생' 읽기

패션 큐레이터 2008. 10. 12. 00:06

 

S#1-그가 달리는 이유

 

오늘처럼 여유가 있는 날엔, 예전에 모아둔 비디오 컬렉션을 꺼내본다. 비디오 가게가 문을 닫을 때마다 대량 구매해 수집한 비디오가 천 여개가 넘어간다. 그 중에서 1998년작 <간장선생>을 꺼낸 이유는 뭘까?

 

환절기 몸 관리를 잘못한 탓인지, 잠을 충분히 잤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겁다. 머리도 좀 아프고. 두통약을 먹고 모니터 앞에 앉아서 글을 쓴다. 이 영화 <간장선생>의 감독은 이마무라 쇼헤이란 사람이다.

 

예전 칸느에서 대상을 받았던 <우나기>란 작품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익숙한 이름이다. 우나기란 뱀장어란 뜻이다. 영화 속에서 아내를 실수로 살해한 남자가 세상과 화해하게 되는 순간, 그의 손에 놓여있던 뱀장어의 모습.

 

이마무라 쇼헤이는 1960년대 일본영화의 뉴 웨이브를 이끌었던 70살이 넘은 최고령 거장이다.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영화적 메세지가 단순한 정치적 담론에 그치지 않고 유머러스함과 여유, 무엇보다도 화해를 위한 따스한 생각들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영화시작과 동시에 오프닝 음악에 맞추어 열심히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 (영판 이 장면은 영화 미션 임파서블을 닮았다) 바로 영화의 주인공 아카기다. 그는 현직 작은 마을의 의사다. 많은 이들을 돌보고 있지만, 환자들에게 하나같이 간염이란 진단을 내려, 돌팔이란 이야기까지 듣고 있고, 그의 닉네임 간장선생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 얻어진 것이다.

 

1945년 일본, 패망을 두달 앞둔 히로시마의 한 시골 마을풍경을 영화는 아련하게 따라간다. 젊은 시절 독일유학까지 다녀온 그지만, 지금은 시골의 작은 병원을 운영하며, 환자들이 약값대신 주는 청어 몇 마리에 고마와하며 지낸다. 이 영화에는 주인공 이외의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군대에서 제공하는 몰핀주사양을 속이며 매일 자신에게 놓는 중독자 의사 친구에서, 20년 넘게 술에 쩔어사는 엉터리 스님. 국가를 위해 매춘을 서비스 한다는 술집 여주인, 매춘을 일삼는 소노코. 영화 속에서 간장선생의 절친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사회적 부적응자이거나 아웃사이더들이다.

 

의사에겐 두발이 생명이다. 한쪽발이 부러지면 다른 쪽 발로 달리고

두 발이 없으면 손으로 달려야 한다고 믿는 철저한 직업의식의 소유자인 아카기.

그에게는 전쟁통에 일본을 병들게 하는 간염을 퇴치하는 일이

삶의 최우선을 차지한다.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 말, 히로시마의 작은 어촌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어촌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비단

작은 마을에 한정된 일들이 아니다. 장성한 아들들은 하나같이 군대에 징집되어 나가고

배고픈 아이들은 누나에게 매춘을 해서라도 밥을 얻어로라고 말한다.

 

인간성 상실과 더불어, 인간의 삶이 이렇게 까지 나락으로 떨어질수 있을까?

전쟁이 가져다준 정신적/사회적 폭력의 흔적을, 그러나 감독은 여유있게 관조한다.

 

 

인간의 신체에서 간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일차적으로 몸의 해독기능을 맡고 있는 간에 이상이 생길때

복수에 물이차고, 얼굴은 누렇게 변하고, 모든 생체리듬이 깨어진채

죽음을 기다린다. 간이 해독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감독은 태평양전쟁 시의 일본 사회를 상징하는

은유로 사용한다. 군국주의가 모든 철학을 대신하고, 천황폐하를

위해 카미가제가 성립하던 시절의 모습을 그는 비판적인, 그러나 따스함을

견지하며 철저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전쟁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폭력과 상처를 낳지만

여기에 대해 절대로 사과나 화해를 하기 보단, 상황이란 면죄부를

들이대며 은폐하기 일쑤다. 아직도 전범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를 보면

그렇다. 입으로는 사죄란 명분을 들이대지만, 그들의 패배에 대한 아련한

슬픔을 그릴 지언정, 자신들이 죽게하고, 혹은 죽음으로 몰고간

이들에 대해 그들은 진심어린 사과는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이마무라 쇼헤이가 보여주는 영화적 횡보는

진정한 지식인의 면모라고 할수 있다. 나아가 전쟁은 결국 일종의

세균과도 같다. 그 속의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빼앗고, 사회적 체제와 이념아래

범죄를 일삼도록 포주하는 악질적인 균사일 뿐이다.

 

그런 간염과 싸우는 간장선생의 모습은

일본사회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고, 사회적인 아웃사이더들을

껴안으려는 감독의 시선을 드러낸다.

 

 

사진을 좋아하던 시절, 비평가 수전 손탁의 글을

읽었다. 유고작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질병들이

예술작품에서 다양한 은유로, 메타포로 사용되는 걸 지적하는 부분이 나온다.

결핵은 예술가의 대표적인 질환으로, 암은 암은 자신의 감정을 지속적으로 억압할 때 생기는 병이다.

톨스토이가 쓴 "이반일리치의 죽음"에 나오는 법원판사가 유쾌하며 고상하게

살기를 삶의 신조로 삼고 살다가 암에 걸려 죽으며 억압이라는 감정이

사람을 얼마나 병들게 하느지를 말하는 부분을 인용구를 따라

읽다보면 마음 한구석이 가득 답답함으로 베워진다.

 

영화 <간장선생>에서 간염은 전쟁 자체가 세균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병증이 전염될수 밖에 없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영화다. 처음엔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주인공의 포스터를

보고 극장에 들어갔다가, 시간이 흐르며, 옷깃을 세우게 되는

소롯함을 간직하고 있는 영화다.

 

나는 어느 사회나 사회적 질환을 일정부분 앓는다고 생각한다.

최근 대한민국을 강타한 전염병은 바로 '자살'이다.

안타깝게도 이 자살이란 사회적 바이러스의 전염속도와 퍼지는 패턴은

전염병이나 유행이 확산되는 형식과 동일하다. 이럴수록 항체를 만들어 낼수 있는

사회 전반의 건강성이 필요하다. 우리가 버리지 않는 한

희망은 여전히 유효하게 우리 곁에 머문다.

 

마지막 장면에서 투하된 원폭구름을 보면서도

부풀어오른 간을 보는 듯 하다며 허망하게 하늘을 바라보던

간장선생의 서글픈 시선이 내 망막에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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