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광부의 딸, 댄서가 되다-영화 '훌라걸스'를 보며 웃다 울은 까닭

패션 큐레이터 2008. 9. 15. 01:11

 

S#1-나는 춤을 출때 행복하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 언제였나 물을 때마다 '뉴질랜드' 타령을 한다. 그곳에서 1년 4개월 동안 다양한 모험을 즐겼다. 해변가를 말을 타고, 청록빛 갑곶에서 연을 날렸으며 붉은색 소파가 놓여진 바다가 보이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카약을 타고 교회에 다녔고, 6번의 번지점프와 2번의 빙하등정, 3번의 스카이 다이빙을 했다.

 

퇴사 직후 20 킬로그램이나 불어버린 몸을 정상으로 되돌리려는 각오와 함께 시작한 여행인지라, 새벽이면 크라이스트 처치 식물원 내의 예술학교에서 새벽마다 발레수업을 했다. 새벽 6시 부터 하는 수업이라 일찍 일어나 뛰어가야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에서 이민을 온 발레리나 선생님과 곱게 서양식 쪽머리를 한 할머니 선생님께 돌아가며 강습을 받았다. 나와 두명의 남자가 더 있었는데 20살의 대학생 제프와 예술 영재로 뽑혀 무용수업을 듣게 되었다는 한국출신의 고등학생이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춤 추는 걸 즐긴다. 뉴질랜드에서 발레를 배웠던 것은 한국에선 썩 마뜩치 않은 시선을 받을게 뻔하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당시 <빌리 엘리어트>란 영화가 인기를 끌어서, 무용학교에 면담을 하러 갔더니, 교장 선생님이 영화보고 바람이 불었느냐 묻기까지 하셨다.

 

새벽에는 기초발레를 익힌 후 후반기 저녁반에는 재즈 발레를 배웠다. 난 몸을 찢는 걸 좋아했다. 그 순간은 힘들고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하고 나면 몸이 개운하고 편했다. 내 안에 짙은 앙금같이 녹지 않은 상처도 없어지는 것 같고, 그래서 여전히 춤을 출때면 환해진다.

 

오늘 소개할 영화 훌라걸스는 바로 '춤'에 대한 영화다. 아니 춤을 통한 성장, 나아가 희망을 잃어버린 마을에 꿈을 찾아주려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예전 <빌리 엘리어트>가 영국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발레가 복싱보다 남성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면, <훌라걸스>는 탄광촌 광부의 딸들이 이렇게 우아하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입증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1965년 폐쇄될 위험에 처한

일본의 후쿠시마 현 이와키시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다.

1930년대부터 일본 산업의 핵심이었던 광산업도 세월의 흐름 속에 경쟁력을

잃고 한때 검은 다이아몬드를 캐던 마을은 산업화의 흐름 속에

쇠락해간다. 하와이언 센터를 지어 구조조정된 인력들을 소화하려는 회사와

여기에 저항하는 노조 그 속에서 숫검댕을 묻히며 살지 않겠다는 소녀들은

어느 날 <하와이언 댄서 모집> 공고를 보고 마음이 들뜬다.

 

 

해고될 운명에 처한 사람들과 새로운 직업의 탄생

이 영화는 산업의 구조조정이 발생시킨 두개의 갈등을 축으로 끌고 간다.

실직의 위험에 처한 사람들과, 전통적 직업관에 젖은 사람들

그 속에서 훌라댄스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우고자 하는 집단의 대립이다.

 

그들은 오로지 30년이 넘게 석탄만을 캐면서 살아왔고

온천이 흐르지만, 차가운 날씨의 광산촌에 하와이언 마을이 생길 수 있다는

허황된 꿈을 믿지 않는다.

 

 

이후 영화는 가정불화 속에서도 꿈을 꺽지 않는 소녀들의

춤 단련기로 채워진다. 여기에 동경에서 왔다는 프로댄서 히라야마의 스토리가

겹쳐지면서, 남성적 사회인 광산촌에 여성의 힘이, 그 매력이 새롭게 씨앗을 뿌릴 준비를 한다.

 

흔히 춤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드라마 투르기가 거의 비슷하다.

갈등의 수준이나 방식도 비슷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광부의 딸이

가부장적인 광산촌의 문화 속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댄서로

성장하는 가에, 그 결과값에 주목한다.

 

 

이미 해고된 남편을 위해, 훌라댄스를 배우는 여인, 평생 시커먼 숫검댕에

쩔은 얼굴이 싫어서 훌라춤에 도전한 여인, 아들의 후원아래 힘을 내며 도전한 아줌마

춤을 배우는 그들의 목적은 다양하지만, 결국은 생계문제와 연계된 문제이고

악착같이 춤이란 형틀에 자신의 신체를 맞추고 담금질하며

새롭게 변화될 자신의 삶을 꿈꾸는 여인들이 등장한다.

 

 

이런 영화의 끝은 항상 해피엔딩이다. 그래서 웃었다.

그런데 돌아보면 눈물이 난다. 결국 그들이 훌라댄스로 지키고 싶었던 광산은 10년후엔

완전히 문을 닫았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사북사태를 기억하는 이들은 이 영화를 결코 낭만적으로

독해할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산업이란 것이 세월에 따라 품목의 부침이 있겠으나

이들의 눈물은 그저 훌라댄스의 화려함 속에 사라지기엔, 너무 암울하다.

 

예전 탄광촌 광부들이 회사에서 구조조정된 후 스트립댄서가

되는 <풀 몬티>란 영화를 기억하는가? 이 영화 보고 즐거웠다고 말하는 자들은

그 입을 함부로 놀려선 곤란하다고 말하고 싶다. 영국의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만들었던

대처리즘이 양산한 사회적 상처가 아니었나? 부자들을 더욱 부자로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던 그녀의 경제정책은 현재, 대한민국의 MB노믹스와 같은 궤적을 �고있다.

 

뭐 그 속에서도 춤이나 추면서 희망을 가지라는 건가?

이맘때면, 서민경제 돌본답시고 시장판을 돌아다시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이들은 이 영화를 가리켜 광부의 딸도 성공할수 있다. 그런 사회를 만들어내겠다고 정치적 캐치프레이즈로

삼을지 모를 일이다. 매우 불쾌하다. 한가위때마다, 시장에서 얼굴 알리기에 급급한

정치인들이 짜증나는 이유, 난 이 영화의 배후에 감추어진 사회적 단면을 보면서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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