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고암 이응로 미술관 기행-먹빛, 세상을 껴안다

패션 큐레이터 2008. 10. 11. 09:27

 

S#1-대나무 숲을 거닐며, 바람의 소리를 듣다

 

이번 주 목요일,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열린미술 특강을 마치고 돌아왔다. 강좌가 열리기 전, 이응로 미술관에선 아주 오랜만에「고암, 먹빛의 여정」전 오프닝 행사가 있어 그곳에 들렀다. 프랑스를 여행하다 보면, 지방별로 대표적인 화가를 기리는 미술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지역과 중앙이 균등하게 발전하고 있음을 미술관 하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문화적 자본 또한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이 땅의 현실에서, 지역별 주요한 화가들을 복원하고 기억하려는 노력은 아름답다.

 

이응로 미술관은 바로 이러한 노력의 작은 소산물이다. 한국 미술사에서 고암 이응로는 전통화법을 세계에 알린 첫번째 인물이다. 작년 한글날을 맞이해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의 한글 작업을 소개했었다. 서체가 한 나라의 정체성과 혼을 표상하는 아이콘이 되어가는 요즘이다. 전통적인 화법을 통해 세계를 꺼안으려는 희망은 고암의 작품 속에서 살아 숨쉰다.

 

이응로 미술관은 2007년 5월에 개관을 했다. 프랑스 출신의 건축가 로랑 보드앵이 고암 이응로의 문자추상에서 영감을 얻어 '빛과 자연'이라는 테마를 건축물 속에 용해시켰다.

 

고암선생의 세계 자체가 동과 서의 만남이고, 이 미술관은 그의 철학과 삶의 흔적을 배어나도록 설계된 건물이다. 흔히 뮤제오그라피란 것인데, 이것은 미술관의 외형과 내부, 작품이 함께 조화를 이루도록 하여 미술관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설계하는 방식을 말한다. 건물의 외곽은 산속의 암자처럼, 대나무와 소나무로 상징을 더해 풍미를 더한다. 무엇보다 건물의 배면에는 작은 연못과, 수목원을 연계해 산책까지 가능하게 한 점이 눈에 띈다.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하늘 빛 아래

미술관 곳곳을 걷는 시간, 가을 하늘아래 산책이 좋은 이유는

피부에 닿는 햇살의 온기와, 그것을 식히는 바람의 온도가 균등하기 때문일거다

미술관 배후에 있는 수목원을 들렀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나무는 더불어 자란다.

매란국죽이니 하는 사군자도, 결국은 나무가 가진 형태적 특성과 감성을

내가 꿈꾸는 '내 자신의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보려는 시도일거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무는 본시 연금술사와 다를바 없다.

연두와, 초록, 진청색이 결합된 대나무 숲길을 걸었다. 향기가 좋다.

나무는 각각의 동세로, 곁을 걸어가는 인간의 삶을 안아준다. 휘어늘어지거나

구부러지기도 하고, 대나무처럼 올곧게 하늘을 향해 치솟거나

때로는 관능미를 토하기도 한다.

 

 

화가의 문자추상에서 영감을 얻어 건축한 미술관 답게

입구부터가 심상치 않다. 한 그루의 소나무가 당당하게 서 있다.

백색의 외벽이 만든 빛의 그림자 사이로, 짙은 고동색과 초록색이 결합된

소나무의 형상이 외롭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화가의 생처럼.

 

 

내부를 들어가면 야외로 통하는 문으로

가을 미풍이 불고, 유리창 위에 각인된 고암의 모습이 보인다.

 

 

오늘 보게 될 기획전시 먹빛의 여정이다.

먹은 물을 흡수하고, 지면을 흡수하며, 그 위에 자신의 혼을

엊는 자들의 소망을 담아낸다.

 

 

<외금강> 10폭병풍, 한지에 수묵담채, 1941년작

 

고암이 일본 유학 후 그린 작품이다. 그는 회화를 통해

세계인이 되려는 꿈을 보여준다. 그가 그린 외금강의 풍경에는 이런 욕망이

그대로 드러난다. 금강을 묘사하는 가벼운 선과 터치, 빳빳한 붓을 이용해 그려낸

금강의 모습 속엔 전통적인 우리 내 방식이 아닌 서양적 어법이 가득하다.

준법이란 것이 있다. 동양에서는 자연의 질감과  표면을 그려내기 위해 사용하는 기법이다.

점을 찍기도 하고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듯 산새를 그리기도 한다.

고암의 작품은 이러한 전통성에서 벗어나있다.

 

 

그가 그린 대나무는 독특하다.

내면을 투사한 나무의 형태를 그렸기 때문이리라.

 

 

<대화> 68*28cm, 한지에 수묵담채, 1983년

 

나무가지 위에 앉아 지저귀는 두 마리의 새가 눈에 보인다.

고암의 그림 속에는 원형과 직선이 잘 조화되어 있다. 그런 삶을 꿈꾸었기 때문이겟지.

미술관 외관에는 물이 흐른다. 그 유속은 관람객들의 발걸음을

고려해 속도를 맞추고, 마치 자연 속을 거니는 듯 한 느낌을 부여한다.

자연과 내가, 그림 속 새들처럼 '대화'를 나누기를 바램해서일까.

 

 

<대숲> 367.5*128.5cm, 한지에 수묵담채, 1951년

 

"대숲에 내리는 눈은 숲의 연두를 지우지 않는다, 그 눈은 연두의 모든 속성과

모든 다양성을 한꺼번에 드러내주는 눈이다. 연금술이 깨어져버린 땅 위에서 대나무 숲은 견디면서

건너가는 자들의 위엄으로 고요하다. 수북의 넓은 들판에서 대숲은 섬처럼 듬성듬성 들어서서 집과 마을들을 감싸고 있다.

그 숲은 세상의 빛과 바람과 습기들을 걸러내서 빛과 그늘, 아늑함과 서늘함, 마름과 젖음, 소리와 적막

소통과 차단의 완벽한 조화 속에서 인간의 마을들을 안아서 키운다.

 

김훈의 <상처와 풍경> 중 악기의 숲 무기의 숲 에서 인용

 

 

그가 그린 풍경은 구체적인 자연이 아니다.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추상을 향해 간다. 추상이란 무엇인가

그건 이상주의자들의 소산이다. 실을 뽑아내듯, 본질을 찾고 주변부의 것들을 지워낸

풍경, 그 마음의 풍경을 우리는 추상이라고 한다.

 

 

 <소> 44*67cm, 한지에 수묵담채, 1966년작

 

오른편 소의 몸통과 눈이 역동적으로 표현된 그림을 보자

주변에 드리워진 브라운 빛깔의 발들은 마치 나무숲을 거니는 느낌마저 발산한다.

고암은 항상 눈을 먼저 그렸단다. 인간이나 동물 어느 쪽이든

눈만큼 날카롭고 예민한 내면을 드러내는 부위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꿈틀거리는 리듬감과 생명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자 이제 정말 주요한 작품을 설명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왼편의 구성작품은 바로 이 미술관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다. 서체에서 일획이 갖는

중요성을 모르지 않을 거다. 한획을 인생에서 어떻게 긋는가에 따라

그 방식과 무늬가 결정되듯, 그의 문자추상에 내재된 의미를 건축적으로 재해석한

미술관의 외형과 옆선, 배면까지 하나하나 살펴봐야 햇다.

 

 

건축물을 읽어가는 과정이 꽤 솔솔한 재미가 있다.

많은 건축학도들이 공부를 위해 이곳을 찾는 다는데, 좋은 경험을 했다 싶다.

 

 

포목점에 가서 명주를 골라 그 위에 먹물을 칠하고, 가위질을 해서

흔히 서양미술의 '콜라주'를 만든 작품이다. 우리의 문자를 해체해서

그것이 의미하는 실제적인 사물들을 그린 작품이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문자추상이라

했고, 서양인들은, 그냥 기호라고 했다. 문화적 맥락이 소개되지 않은 탓이다.

 

 

 

 80년대로 접어들면서 고암의 작품은

문자추상에서 사람의 무리, 군상을 그리는 주제로 변모한다.

정치적 격동의 세월, 80년대는 바로 광주 민주항쟁의 시절을 교직하며

거슬러간다. 초기엔 기하학적이고 장식적인 인간의 형태들이

존재하지만 후로 갈수록, 정치적 환경 속에 놓여진

인간들의 싸우는 모습이, 혹은 연대하기 위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점을 찍듯, 전면에 나타난다.

 

 

이 그림을 놓고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보여주고선

뭐하는 그림인것 같은가라고 물어봤단다.

어른들은 춤을 춘다고 했고, 아이들은 싸움을 한다고 했단다.

왜 그랬을까. 광주항쟁 속에 초개처럼 죽어간 이들의 넋을 그렸던

화가의 불편한 심기가, 그러나 그 속에서도 연대하고 손을 잡는 인간의 희망을

그린 작가의 의도가 맑은 눈을 가진 아이들에게만 들켜버린 게 아닐까.

 

 

고암의 모습이다.....그는 눈빛이 서늘하다.

청년때와 노년때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관람객들의 발걸음, 그 속도에 맞추어

흐르는 물길이다. 건물 밖에는 대나무를 심어 대숲에

가려진 암자처럼, 미술관을 표현했다.

 

 

언어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언어의 문법을 배우고, 그 사용상황을 배우고

그것이 표상하는 상징을 배운다. 그 문법은 세대를 통해 전수되지만

결국 이 과정에서 하나의 언어가 갖는 다양한 가능성을 버리고 하나의 의미만을

취사선택해서 대못질을 하고, 고착시켜 버리기 쉽다.

 

이때의 언어는 더 이상 우리가 바라보는

사물을 혼합시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연금술사의

재료가 되지 못한다. 고암의 작업은 바로 언어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에 충격과 더불어 신선함을 불어넣는다.

 

 

미술관 옆에는 대전 시립 미술관이 있다

다양한 조형물들이 있다. 살펴보시면 좋을 듯 하다.

 

 

 이응로 미술관에서 꽤 오랜동안 머물다

시립 미술관에 강의를 하러 갔다. 주변의 수목원도 좋고

단 가을이라, 풍성함이나 녹색빛이 많이 부족하긴 했지만, 산책하기엔

안성맞춤이다. 수목원 내의 대나무길을 걸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대나무에 우리가 끌리는 이유는 그 단단함과 더불어

속을 비울수 있는 용기때문일거다. 내려놓기 작업을 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단단해 질수 있을까. 시간의 연금술이 빚어내는 대나무의

모습 아래는 극기와 자기를 넘어서되, 껴안으며 넘어가는 포월의 철학이 담겨 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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