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흥미로운 한편의 애니메이션을 봤습니다.
원래 일본의 여성감독 가와세 나오미의 <너를 보내는 숲>을 볼 생각이었는데
시간을 놓쳐서 대안으로 보게 된 작품이었죠. 그런데.....너무 좋습니다.
<페르세폴리스>는 이란 출신의 마르잔 사트라피와 뱅상 파로노가 연출한 작품입니다.
유러피언 애니메이션을 오랜만에 접하는 소소한 기쁨이 샘솟습니다. 장 지오노의 <나무 심는 사람>처럼
유럽의 애니메이션은 일본과 다른 미학적 특색을 가집니다. 우선 화면구성 자체가 단순하고
인물을 굵은 선으로 그려내서, 양감을 많이 부여하는 편이지요.
물론 연출로서 참여한 마르잔 사트라피는 만화가이고
그녀의 소설 <페르세폴리스>를 극화한 것이라, 애니메이션의 전체적인 정조랄까
화면 구성과 인물의 구현에는 그녀 나름의 독특한 손길이 녹아 있습니다.
더구나 감독 자신의 실제 성장기록이 배어나오는 작품이기에
현실에서 여성으로 성장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더욱 아련하게 느껴집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에 거주하는 이란 출신 만화가 마르잔 사트라피가
이슬람 혁명기의 어린 시절을 만화로 그린 원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요.
여섯 살부터 열네 살까지 테헤란에서 보낸 삶을 흑백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처음 왜 칼라가 아닌 흑백일까 생각을 했습니다. 드라마 속에서 재현되는 사회적인 풍경이 보여주는
이분법적인 구속이나 암울함을 강하게 드러내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팔레비 정권의 몰락과 이슬람 혁명, 모든 것을 황폐화시킨 이라크 전쟁까지
격동기에 진보적 지식인 가정에서 자란 사트라피가 체험한 이란의 사회상이 마치 동양의 수묵화처럼
담담한 농묵으로 표현되어 있지요. 혁명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변절, 빛이 바랜 혁명의 꿈속에서 여전히 연두빛 올리브 나무 아래
펼쳐지는 소녀의 성장기가 곱게 그려진 드라마입니다.
어린시절 부터 러시아에서 마르크스를 공부한 진보적인 삼촌 덕에
마르잔은 혁명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시선을 익히게 되지요.
국민들의 피로 일궈낸 혁명 이후, 군부와 또 다른 독재자들, 종교 세력들의 반동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이란의 근대사가 너무 잘 녹아 있습니다.
혁명과 내전, 끊임없는 권력투쟁과 극단주의 종교세력들이
등장하고, 그 속에서 개인의 삶이 어떻게 구속되고 변형되는 지,
참 담담한 필치로 그려내는 작품이었습니다.
모든 여성들은 종교적 율례를 따라 히잡(차도르)를
쓰고 다녀야 합니다. 마르잔은 이런 사회적 구속 하에서도 펑크에 몰입하고
마이클잭슨에 빠져있지요. 붙임머리를 밖으로 내 차도르를 쓰고, 패셔너블한 데님 재킷을
입고 마이클 잭슨의 뱃지를 달기도 하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그녀는
항상 감시요원들에게 걸려 혼줄이 납니다.
탈 권위를 바탕으로 시작된 음악의 장르답게
펑크에 물들기 시작한 이란의 청소년들의 하위 문화는
엄격한 종교적 율법과 구속에도 불구하고 성황을 이룹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주인공 마르자인 꿈꾸는 것은 코카인과 ?어진 청바지가
상징하는 섹스 피스톨즈의 세계는 아닙니다. 그저 착한 예언자가 되어서 많은 이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길 꿈꿀 뿐이지요.
이 애니메이션이 마음에 드는 건
마르잔이란 소녀의 성장 과정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장소설(bildungsroman)을 좋아합니다. 한 개인의 면모가
형성되는 과정을 다룬다고 해서 형성소설이라고도 부릅니다. 사실 한국 문학에는 많은 성장소설 작품이
있습니다. 황순원의 '인간접목' 윤흥길의 '장마' 김주영의 '고기잡이는 갈대를 꺽지 않는다'와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인데, 하나같이 한국 전쟁이란 특수한 경험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페르세폴리스가 특이한 관점을 갖는 다는 건
전쟁이나 혁명같은 거시적인 요소들이 들어가긴 하지만
가족이란 힘이, 항상 지원군으로 등장하고, 생을 탐색하는 과정의 멘토가 되어주기에
그녀의 성장과정은 오롯하고, 다양한 빛깔의 체험을 행복하게 소화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녀의 변모와 변화과정이 슬프지 않은 웃음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녀에겐 융드 옥정 여사를 닮은 할머니가 있습니다.
마르잔에게 삶의 다양한 진실과 지혜, 대처방법을 가르치는 네비게이터입니다.
"왜 할머니 옆에서면 항상 향긋한 냄새가 나요?"라고 물어보는 손녀에게
"쟈스민 꽃을 환하게 꺽어 브래지어에 가득 넣어두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여유있는 미소와 낭낭한 목소리가 유독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이 애니메이션에는 다양한 배우의 목소리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도 프랑스의 국보급 여배우들의 목소리 연기가 아주 볼만하지요.
까뜨린느 드뇌브와 다니엘 다리유, 키아라 마스트로얀니등, 한자리에 모이기가
참 쉽지 않을 구성인데, 흔쾌히 목소리 출연에 승낙을 했다는 군요.
흑백 화면이라 처음엔 그저 고풍스러울줄 알았는데, 의외로
절제하는 아름다움이랄까, 극중 인물의 대화를 깊게 관찰하도록 돕는 요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시각적인 포화 보다는, 듣기에 중점을 둔 작품이라는 말이겠지요.
융드옥정 여사를 닮은 할머니의 지혜는
다음과 네이버 지식검색에서도 찾을수 없는 뼈저린
사연들과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지요. 연일 예전같지 않은 차가운 날씨로
긴 환절기를 보내고 있는, 질긴 성장통으로 아파하고 있는 예쁜 소녀들에게
권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잊지 마세요 여러분이 뭘 하든, 전 여러분을 응원할 거에요
왜냐면 여러분은 마르잔처럼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일테니까요.
호랑이의 눈을 뜨고 세상속으로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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