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Travel/해를 등지고 놀다

시베리아 열차의 지루함을 견디는 방법

패션 큐레이터 2008. 2. 29. 02:16

 

열차 여행 이틀째......먼동이 트는 시간

시베리아의 아침은 아주 늦습니다. 10시가 되어야 차창밖의 풍경은 아침 채비를 합니다.

 

 

기차 여행을 하면서 무료함을 견디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밀린 잠을 푹 자는 것입니다. 물론 덜컹거리는 기차 속 숙면을 취하긴 어렵지만

이럴때, 약간의 보드카를 마시고 자면 아주 좋지요. 아침 일찍 일어난 터라

가져간 몇권의 책을 꺼내 나 자신만의 망중한을 즐겨봅니다.

후배들은 아직까지 꿈속을 헤매이죠.

 

  

 

짐을 줄이느라 많은 책을 가져가진 못했습니다.

어차피 생소했던 러시아 미술을 공부하고, 경험하기 위한 여행이었기에

시중에 나와 있는 러시아 미술 관련 책 3권을 사서 열심히 기차 안에서 읽었습니다.

특히 이병훈씨가 쓴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은 아주 유익했어요.

모스크바에서 보낸 긴 시간 동안 유용한 여행 지침서로, 문학과 미술을 망라하는 다양한 러시아의

예술세계들을 실제 여행기 형식으로 잔잔하지만 깊이있게 다루었습니다.

실제 모스크바에서 체류한 동안 이 책에서 소개한 곳들이 대부분의 여정을 차지하거든요.

 

최근에 출간된 <러시아 미술사>는 러시아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던 이진숙씨가 쓴

책입니다. 천년 미술사의 내용이 깊고 자세한 서술되어 있어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국립 러시아 미술관을 3일 내내 다니는 동안 이 책을 끼고 다녔어요.

작가 한명 한명의 약력과 작품세계, 러시아 미술사에서의 위치와 맥락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책을 읽다 약간 머리가 아파올쯤, 머리도 식히고 아침 세안도 할겸

화장실로 갑니다. 용변을 보면 바로 시베리아 벌판에 떨어지는 무서운 화장실이죠.

(출발전 30분 / 다음 역 정차 전 30분엔 꼭 문을 잠근답니다)

화장지가 있긴 한데, 질이 썩 좋진 않습니다. 수도꼭지를 자세히 보면

아래에 위로 누르는 버튼이 있어서 이걸 누르면 물이 나오죠. 머리도 감을수 있더라구요.

저는 코펠을 두개 가져갔기에, 여기에 아래 보시는 사모바(samovar)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다가

조금씩 찬물을 섞어서 머리도 감고 세면도 했어요.

 

  

 

머리도 상쾌하고.....아직 꿈나라에 있는 동생들과 형을 위해

코펠에 물을 다시 받으러 갑니다. 왼쪽 사진은 어제 말씀드린 승무원 방의 모습이구요.

사진에는 나와 있지 않은데, 승무원 방에는 작게 마실수 있는 차와 음료, 과자들

도시락 라면도 판답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친구들을 깨워.......(어여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을 먹습니다. 코펠에 햇반과 레토르트 카레를 담아 준비를 하고

라면은 한개씩만 꺼내 국물을 먹을 요량으로 마련합니다. 사실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몸의 움직임이 적기 때문에 그리 배고프진 않습니다.

그저 수다떨고 이야기 하며 약간의 주전부리가 필요하지요.

 

     

 

주전부리가 필요할때는 알아서....어디에선가

군것질 거리를 담은 수레가 왔다갔다 합니다. 한국과 참 비슷하지요.

러시아 사람들이 좋아하는 한국산 초코파이도 있고.....놀라운건 삶은 계란도 있다는 사실.

 

왼쪽은 가져간 귤을 아침에 식사 후 먹었습니다.

후배가 그러더라구요. 시베리아에 가서 꼭 사진으로 찍어야 하는 것이

귤까는 장면을 담는 거라고. 왜 그런가 하고 물어보니

인터넷에서 악플러들에게 시베리아에서 귤이나 까라는 말을 한다는 군요.

책 보다가 귤 까서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지루하니 별 짓을 다하는 군요.

 

 

밥을 먹고 나선 기차 안에서 몸을 움직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러 칸을 왔다 갔다 하면서

그나마 움직이는 것이죠. 사진 속 보이는 칸은 2등칸인 쿠페입니다.

여기도 똑같이 침대는 4개지만, 문을 닫을수 있기에 훨씬 아늑하죠.

 

 

 

우리 옆 자리에 계셨던 할머니와 따님.

말은 안통해도 항상 아침인사는 러시아어로 깍듯이 드리곤 했어요.

도브라에 우뜨러.....라고 하면 된답니다. 할머니가 저희 보고 귀엽다고

러시아 흑밀빵이랑 도시락 라면을 주셨어요.

(저는 어디를 가든 할머니들에겐 꼭 사랑을 많이 받는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한국 야쿠르트에서 생산하는 도시락 라면은 러시아에서 엄청난 물량이 소화됩니다.

한국에선 매출이 좋지 않았지만, 러시아에선 연간 2억 5천만개 이상이 팔리는 베스트 셀러지요.

작년 모스크바의 외곽도시인 라멘스코예에는 1만 3천평 규모의 라면생산 현지공장이 들어섰다고 해요

러시아 사람 1억 4천명의 인구가 매년 평균 2개 이상은 사먹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사진 속 도시락 라면은 치킨맛인데 매콤한 맛도 있습니다.

 

 

 

또 다른 정거장에 내려 주전부리들을 삽니다.

순대처럼 보이는 러시아식 소세지랑 옆에 연어의 먼 친척인 생선도

한 마리 사서 맥주랑 곁들여 먹으면 참 좋습니다.

 

 

이번 여행 기간 동안이 러시아의 대학생들에겐

2주 동안의 휴가기간이었습니다. 기차 안에서 많은 러시아 대학생들을 만났지요.

이번 여행하기 전, 기차 안에서 뭘 할까 생각을 하다가 후배가

랩탑에 40여편의 영화를 다운 받아 와서 영화보고 음악 들으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물론 러시아 친구들도 초대해서 같이 보구요.

 

 

하바로프스크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다는 얄료샤.

사진찍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는 낮을 많이 가린다며 살짝 고개를 돌리네요.

이 친구는 영어를 곧잘 해서 오랜동안 수다도 떨고 같이 밥도 먹고요.

제가 러시아 문예비평가인 미하일 바흐찐 좋아한다고 했더니 놀라던데요.

그 사람 책 읽어봤냐고 그래서, 한국에서도 이분 책 많이 번역되어 있다고 했죠.

졸업후에 교사가 되고 싶다는 알료샤의 예쁜 꿈이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두고 온 모습들을 돌아다보기 위하여 겨울 기차 여행을 떠났습니다.
입김이 녹아내리는 차창에 흔들리는 내 영혼의 시간이 흔들릴수록 더욱 좋지요.

들녘 부끄러움을 말끔히 씻어내린 자갈색 자작나무가 아득하게 눈부시고
스스로 남아 있기를 노래한 대지에 홀로 남아 그 적요의 시간을 즐깁니다.
젖이 마른 엄마의 가슴에서도 건강하게 자라난 아들처럼, 꿋꿋하게

땅에 뿌리 내리며, 부박한 여행자의 삶을 지켜보며, 어디 나처럼 살아보라며 충고하는 듯 합니다.

 

8개의 시간의 동선을 지나는 장구의 여정은

사실 생각처럼 그리 낭만적이지 만은 않습니다. 많이 심심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죠.

하지만 함께 간 사람들과 참 많은 진솔한 이야기들, 속내를 드러내며 깊어지는

그 시간도 익숙해지만, 아주 행복한 시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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