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이런 주전자 보셨어요?

패션 큐레이터 2007. 5. 24. 22:18

 

이틀 연속 다음 메인에 제 글이 뜨면서

거의 20만 가까운 분들이 제 블로그를 다녀갔습니다.

일일이 댓글을 달고 답변을 하고, 부지기수로 퍼올려진 스크랩의 횟수를 보면서

역시 메인에 노출된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고 그 위력에

사못 몸서리 처지기 까지 합니다.

 

대부분 연휴답게 저또한 내일은 월차로 쉬고

주말까지 쭈욱 이어지는 쉼의 연결고리를 하나씩 매듭지어보려 합니다.

글을 쓰는 지금, 책상 위엔 초록빛 햇살 맞으며 쪄낸 녹차잎파리와

우려내기 위해 다기와 알맞은 온도로 끓여낸 물이 담긴 주전자가 보입니다.

 

 

인사동, 모 전통화랑에 가면 여름방학마다 열리는

다도예법 수업. 대학시절 그곳에 우연히 들렀다가 한국의 다도를 배우며

찻물을 올리는 것과 끓여서 식히는 것. 잎사귀의 결들을 읽는 법을 익혔습니다.

 

지난 화요일날 인사동에 점심을 먹고 급하게 나갔습니다.

다음에서 UCC 스타로 뽑혔다며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바로 그날 이었지요

저는 원래 수요일날 했더라면 했었지요. 그날 헤이리에서 멋진 파티와

음악회, 무엇보다도 여러분에게 너무나도 보여주고 싶은 인도미술전이 열리고 있거든요.

 


인터뷰를 마치고, 햇살 좋은 인사동을 잠깐이나마 거닐 요량으로

산책하다가 통인가게를 지나쳐 갈때였습니다. 현수막에 누군가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건

알겠는데 제목이 제 시야를 끌더군요 <주전자의 숨겨진 이야기>.....라

도대체 뭘까? 하고 지하 갤러리로 들어갔습니다.

 

온갖 형태와 디자인의 주전자들이 눈에 펼쳐지더군요.

서양화, 그 중에서도 유화중심으로만 글을 쓰거나 컬렉션을 하다보니

솔직히 공예를 비롯한 다른 장르의 미술들엔 많이 문외한입니다.

실제로 미술시장이 활짝 열렸다고 하지만 공예나 도예 등 다른 장르들은 일련의 반열이랄까

이런 선에 오르는데 여전히 힘든거 같습니다.

 

김태곤이란 동년배의 작가에게

주전자의 의미에 대해 물었습니다. 작가는 산 속에서 도예작업을 하는데

주변 작은 연못에서 물고기를 키우면서, 우리 내 생을 유지하고

지탱해주는 저 물이란 물자체를 담아내는 공간, 생명의 공간으로서의

주전자를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주전자엔 산에서 피는 다양한 나무와 열매들이

일종의 형상화된 패턴을 그리며 인각되어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죠.

마치 주전자가 한 그루의 오래된 정원의 나무처럼, 그 혈맥과 줄기, 잎사귀에서 품는 기운들

그 사이에서 함께 섭생하는 버섯의 모습을 감싸안고 돌아갑니다.

 

마치 저런 주전자에 담긴 물을 마시면

제 몸도 짙은 고동색의 자연스런 나무가 되어 피어날 것 같습니다.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윌리엄 모리스의 공예운동사를 열심히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공예를 제작하는 장인에게 예술가의 지위를 부여하라고 주장하지요.

 

오늘 소개드리는 주전자도 이미, 단순하게 물을 담아내는 물자체로서의

속성보다는 생명과 자연을 어우르는 담지자로서, 우리의 친숙한 일상의 풍경이지만

그 내면의 의미들을 새롭게 구현하며 다가옵니다.

 

 

새로 산 유리 주전자 새까맣게 타 버렸다
버리려다 잊어버린 낡은 주전자 기억하고
불 위에 올렸다, 찌그러진 몸통, 구부러진 입
흔적만 남은 꽃무늬 몸통 속에서 물이 끓는다
잊어버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가
잊어버리는 것보다 기억 하는 일이 더 힘든 일
첫 편지, 첫 키스, 첫 사랑, 첫 눈물, 첫 이별처럼
내가 기억하는 것은 상처로 남았는데
우연히 책갈피 속에서 찾은 꽃잎 한 장,
잊어버린 옛 친구의 사진,
서랍 속에서 툭 떨어지는 보내지 못한 편지
잊어버린 것들은 잊어버린 시간과 함께 온다
오래된 주전자가 쉬쉬쉬 소리 내며 끓는다
내가 떠나보낸 시간도, 나를 버린 시간도
모두 잊어버린 오래된 주전자다
눈 나리는 밤 돌아서 올 때 펑펑 울던 그 사람처럼
오래된 주전자 펄펄 끓고 있다.

 

정다혜의 詩 <오래된 주전자> 전문

 

 

늦은 시간, 우려낸 차 한잔 마시다 보면

이런 저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데, 오늘은 제 눈에 들어오는 저 주전자의

조형성으로 인해, 초록빛 잎파리들이 더욱 가슴 한 구석을

스며드네요. 옛친구를 생각하고 옛사랑을 생각하는 추억과 상념의 시간

 

팔팔팔 소리내는 주전자 속에 따뜻하게 한소끔 끓여내

보는것은 어떠세요? 차 한잔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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