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빛으로 그린 그림

소녀, 기억의 갑옷을 벗다

패션 큐레이터 2006. 6. 18. 00:44

 

오늘은 제 블로그의 소중한 독자분께서 보내주신 사진으로

채워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파리 현지에서 전시회를 가진 김혜라님은

현재 파리 8대학, 예술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계십니다. 블로그를 써오면서

참 기쁠때가 바로 이 블로그란 창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표정과 그들의 삶과 치열한

생의 무늬들을 읽어낼 수 있을때 일거 같습니다. 소중한 사진을 보내주신 혜라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언어는 언제나 어떤 비어있는 장소를, 정지된 시간을,

다가가면 점점 더 손에 잡히지 않게 물러나기만 하는 어떤 중립을 보인다.

-장 자크 뷔낭베르제, '철학의 유혹'에서-

 

#1-소녀, 기억의 갑옷을 벗다

 

기억은 항상 언어가 가진 배후의 힘을 빌어 과거를 재구성 한다는 점에서 가역적이다. 잔상위에 은빛 기억의 옷을 재단해가는 사진작업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김혜라의 작업이 보여주는 것은 빛이란 거대한 힘의 질서 앞에서 중립적 실체를 드러내는 형태들의 자화상이다. 자화상은 단순히 현재의 풍경만을 포착하지는 않는다. 미얀마의 풍경은 그녀의 렌즈 속에서 고요한 기억의 필터를 통해 걸러진 침묵의 풍경들이다.

 

 

그녀의 사진 속 등장하는 미얀마의 작은 마을 '핀우리'의 풍경은 그저 이국적이라기 보다는 산업화 이전의 예전 우리들을 연상시킨다.

 

 

사진을 통해 기억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특정한 기억의 빛깔을 강요하는 작업일수도 있다. 김혜라의 작업은 이러한 강요와 환타지성의 재작업에서 철저한 자기만의 거리를 유지한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작가는 많은 사진을 찍었다. 이러한 방황인(homo viator)의 면모는 그녀의 사진 속 곳곳에 베어있다. 성인이 되어 다시 찾아가는 미얀마에 대한 기억, 유년의 뜰 한구석을 갈무리하는 그곳에서 다시 중립의 언어로 마장된 렌즈를 꺼내어 닦아낸다.

 

 

根源缺落强迫 異邦强迫

그 먼 존재의 시원, 내가 원래 있어야만 하는 장소로 돌아가기

윤대녕의 '은어낚시 통신' 중에서

 

그녀의 작업은 마치 예전 자신이 돌아가야 할 성소로 '자신의 몸을 태워야만 다시 들어갈수 있는' 새들의 전설을 생각하게 한다. 작가에게 있어 정체성의 문제는 결국 자신의 기억의 영역 속에 한 구석을 차지하는 고향이란 장소를 찾아와서야만 이루어지는 것인 셈이다. 작가는 이제 삼십세에 접어 들었다. 희망의 밥그릇과 혁명의 뜨거움을 기대하기엔, 이젠 현실의 벽과 소통의 어려움을 통렬하게 배워가는 나이의 대열에 끼게 된 셈이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시선속에서 기억의 집 위에 올올히 앉아있는 새들의 풍경은 안온한 평화의 풍경은 아닐듯하다.

 

 

그녀에게 있어 풍경과 집과 사진은 동일한 의미의 깊이를 갖는 다른 외피의 집과 같다. 사진은 이미 그녀의 관념 속 고향의 풍경이 안온하게 자리하는 존재의 근거다. 때로는 박차고 나서서 새로운 땅을 향해 이주의 욕망과 방황의 고통을 견뎌내게 하는 거주지이기도 하다. 다시 파리로 돌아와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작가는 무슨 생각에 빠졌을까? 길위에서의 사색이 그녀의 사진에 어떠한 색채를 부여할지는 사실 사진 자체의 존재성에 달린 문제다. 중요한 것은 그녀는 현재 돌아갈 그 어떤 곳을 찾고 있다는 단순한 메세지만을 전해줄 뿐......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빨랫줄은 왠지 고집스럽다. 갈빛물에 빨아 널린 기억의 옷들을 걸기엔 역시 약간은 느슨하게 풀려진 빨랫줄이 제격이지 싶다. 도회의 지붕 아래서 내일이면 다시 후줄그래질 과거를 열심히 빨아 너는 사람들의 풍경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지나가는 햇살에 살을 말리고 있는 빨래 때문에 골목은 언제나 따뜻하다. 작업복을 보면 식구를 먹여 살리는 튼실한 어깨의 늙은 가장을 떠올린다. 아기 옷가지를 보면 그 아기가 몇 살쯤인지 헤아리기도 하고, 양말짝을 보면서 그 집 식구들이 몇 명인지 가늠하기도 한다. 아파트 베란다에 널린 것보다 골목 빨래가 더 눈부셔 보이는 것은 왜일까. 골목의 빨래는 그것을 입고 사는 사람들의 살갗이기 때문일까. 매일매일 벗어내고 빨아내고 다시 걸쳐 입는 그들의 치열한 삶의 살갗. 거친 벽을 따라 빨랫줄을 치고 널어놓은 것은 그들의 체온에서 실밥자국 많은 꿈을 읽는다. 퍼덕이는 그들의 비늘을 본다. 푸른 덩굴과 잎을 가진 목소리를 듣는다. 어느 쪽문 안, 라디오에서 사철가 한 소절이 빨래집게로 붙든 햇살을 따라 넘어가고 있다.'

                                                                                        -김수우의 빨랫줄 전편-

 

 

시골 버스가 있는 풍경은 아늑하다. 먼지가 캐캐히 앉았을 힘빠진 좌석, 이가 나간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5월의 풍광은 신산하면서도 화사한 연초록빛 그늘의 서늘함을 풍긴다. 구불구불 한적한 변두리를 돌아 뿌연 매연을 내 뿜으며 번잡한 시내 한복판을 지나는 동안 차선을 바꿔가며 속력을 내다가도 때론 신호등 앞에 멈춰서는 버스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한다. 일상의 비루한 풍경을 수도없이 반복하는 버스의 모습은 여전히 정치적 현실 앞에 좌절하고 있는 빈국 미얀마의 슬픈 서정성을 드러내는 장치다.

 


 

마차를 보면 타고 싶다. 바다로 닿아있는 땅, 그 바다의 끝으로 마차를 타고 달리고 싶다. 아늑한 카우치에 누워 잔멸하는 5월의 풍광을 눈속에 담아내고 싶다. 시골의 풍경을 벗어나 빗물들의 정거장인 바다에 가서 편하게 눕고 싶다. 사진 속 시골 마을의 정경은 작가의 상상 속 바다의 풍경과 맞닿아 있다. 땅은 끊임없이 정주와 이주의 꿈을 계속하고, 시골에서 하나씩 도시로 빠져 나가는 이농의 힘은 여전히 이곳에서도 마치 예전의 영화를 그려내듯, 길거리 한켠에 서 있는 마차는 푸른 하늘 아래 슬프게 놓여있다.

 

 

기억이 가역적이라는 사실은 언제든, 긍정항의 힘으로 새롭게 태어날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있어 모든 풍경은 빛바랜 기억이 아닌, 기억의 저수지에서 막 놀다 들어온 아이들의 모습마냥 따스하고 송연하다.

 

 

해를 등지고 놀다, 엄마가 '밥 먹어 어여'....하고 부르면 막 달려갔던 유년의 뜰, 그 기억의 장치 앞에서 사진은 기억이 가진 힘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억의 힘은 세다. 그녀가 벗어던진 기억의 갑옷과 이제 새롭게 입게될 기억의 옷은 어떤 빛깔을 띠며 전개될까?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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