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사진읽기 작업을 할때
꽤나 열심히 썼던 분야가 바로 패션사진 분야였습니다.
많은 사진작가들을 다루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헬무트 뉴튼에서 파트리크 디마쉘리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주의 작가들을
다루었지요. 사실상 블로그를 써오면서 이러한 전문적인 작가들에 대한
작가론을 쓰면서 좋은 호응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실 그래서 약간 기도 좀 죽어 있었고요
저는 적어도 블로그란 것이 꼭 인터넷 상의 친구들과의 의사소통 창구로만
사용되는것, 일종의 한담거리를 소통하기 위한 디지털의 옷을 입은 마실정도로
사용되는 것에는 의문을 던집니다. 적어도 디지탈과 아날로그라는 복합적 구성을
추구하는 최근의 경향은 더욱 이러한 철학과 맞닿아 있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패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시절 부터 패션 디자이너로 성공하고 싶었지요. 물론 그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패션 구매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경험도 쌓았고 브랜딩도 해 보았습니다.
아직도 사람들은 패션 사진 하면 그냥 단순하게 상업적 목표를 위해 찍은 사진
정도로만 치부를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 패션은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될수 있는 사유의 체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소개할 영국의 국립 사진 미술관에서 열린 FASHINATION 전은
바로 이러한 '근대성' 에 대한 패션을 통한 사유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작업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facination 과 fashion의 결합
바로 패션이 우리삶의 한 부분, 가장 강력한 유혹과 매혹의 도구로서 사용되지만
그 속에서 소외되거나 혹은 새롭게 의미를 창출하는 기제로서 사진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이 전시의 매력은 더욱 힘을 발합니다. 유혹은 항상 거세의 매력을
내부적으로 이용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일까요? 포스터의 이중적 의미를
드러내는 가위와 나비의 병치는 상당힌 잔혹한 미학을 드러냅니나
필립 로르카 디 코르시아의 작품을 여러분은 지금 보고 계십니다
작가는 패션사진으로 현재 최고의 성공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주로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한 영화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영화적 양식과 이야기 구조들이
깊게 베어 있습니다. 그는 현재 '에스콰이어' 하퍼스바자'등과 같은
유명한 패션잡지의 고정작가이기도 하지요.
보스턴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예일대학교에서 예술학을 공부했던
다소 지성파작가입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 속에는 현대성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영화적 양식화의 화면 속에서 펼쳐집니다.
지금 보시는 그림도 마치 양식화된 무대위에 놓여진 마네킨처럼
매우 냉정한 시선으로 타자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패션이 아름다운 것, 혹은 매혹적인 것은, 그것이 손으로 꼭 잡아내기에는
너무나도 현시적이고 순간적이고 찰라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이 찰라적이고 덧없는 것들을 통하여 우리는 항구적인
생의 원칙들을 오히려 캐묻고 끄집어 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성과 덧없음은 이제 또 하나의 자아처럼 붙어있는
그렇게 엉겨있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작가의 사진입니다.
보시는 위의 사진은 스웨덴출신의 랄스 닐슨이란 작가의 작품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작가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저는 작가들 중에서 특히나 영화적
상상력을 차용하여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가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속에 드러나는 이중적 자아의 모습은 마치 매쉬원단의 제 2의 피부를 걸친
현대인의 외로운 모습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영화의 환기성을 이용하는
그의 허구적 진본성은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즉각적인 의사소통의 장을 열어젖칩니다.
이중적 자아, 혹은 또 다른 자아의 윤색되고 패션화된 표면 위에서
그는 인간의 섹슈얼리티와 인간의 윤리, 양성간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요
그러나 결국 집단으로 구성된 설치미술은 허영과 환상의 껍질을 벗기고
기만적인 집단의 무의식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미술은
아직까지도 실험적인 프로젝트에 머물러 있습니다.
저는 요즘 나이지리아 출신의 작가 잉가 쇼니발에엑
푹 빠져 있습니다. 예전에 한번 21세기 미술의 지형도란 폴더에서
그의 작품들을 심층깊게 다루었습니다.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탈식민담론이 한국사회에도 불어닥치면서
우리는 우리 사회를 읽어낼만한 자생적 언어의 부재를 한탄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단순하게 생각할수 있는 부분은 아닐듯 합니다.
백인 남성의 시선으로 규정되어온 실제의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미술사도
이러한 비판의 잣대위에서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있지요.
우리보다 거대한 초자아에게 우리 자신의 정체성의 규정까지도 맡기는 것
그래서 그들이 내린 정의를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 믿는것.
이를 통해 우리가 자생적으로 우리를 규정할 언어를 만들 여유도
혹은 힘도 가지지 못한 상태, 바로 이러한 정신적 식민상태는
오늘날 현대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며 우리를 괴롭힙니다.
쇼니발은 바로 이러한 이중성에 대해서
가면을 쓰고 타자의 역사를 마음대로 써온 그들에게 한방의 총탄을 날립니다.
그들이 가르쳐온 문화와 제의
혹은 습속들, 여기에는 물론 패션이란 요소가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지요.
패션은 우리가 살아가는 다양한 문화의 집적체로서
패션을 기호화 해서 읽어감으로써 우리는 삶을 지배해온
시각적 지배의 구조들을 밝혀낼 수 있습니다.
위의 두 사진은 스티븐 마이젤의 작품입니다.
아마도 캘빈 클라인 광고에서 아동 포르노그라피를 사용했다고 해서
방송 금지 처분을 받았던 작가를 기억하실겁니다.
바로 이 작가 스티븐 마이젤이지요. 파슨즈 패션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한
재원이었지요. 그의 사진은 끊임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클래식 영화로 부터
차용한 듯한 이미지들로 가득합니다. 그의 사진은 마치 60년대 소피아 로렌의
영화처럼 우리들 앞에서 펼쳐지지요. 보그 이탈리아에 매달 써내는
그의 사진 단상은 패션 사진의 철학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멋진 보고서입니다.
하지만 그는 사진을 통해 철학을 들먹이진 않습니다.
'Art & Fashion > 샤넬-미술관에 가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로운 코너를 시작하며..... (0) | 2007.03.05 |
---|---|
따뜻함이 그리울때는-청바지로 그린 그림 (0) | 2006.11.17 |
바비 포에버-바비를 그리다 (0) | 2006.11.14 |
마놀로 블라닉을 입은 여자 (0) | 2006.11.10 |
바비스토리-공주님 우리 공주님 (0) | 2006.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