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책 읽기의 황홀

남은 자들을 위하여-그녀가 나무를 껴안은 이유는

패션 큐레이터 2003. 6. 9. 11:52

그녀가 나무를 껴안은 이유는

 

하나의 꽃잎 혹은 길 위의 한 마리의 벌레가 도서관의 모든 책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숲에서 눕다-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명상

 

헤세의 글을 읽다가 한번 적어보았어요. 어릴적부터 저에게는 언제나 즐겨 자연의 모습을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자연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양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매력과 색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목질화된 나무의 결을 보면서 내 안의 숨쉬는 나무의 뿌리를 거두어 보는 거죠.이렇게 하나하나 발견한 자연의 언어들이 제 가슴속에서 옷을 디자인하고 읽어내기 위한 조형의 기초가 됩니다. 이끼가 낀 시냇가의 작은 돌,물위에 떠있는 수국의 잎사귀......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듯 합니다.자연은 우리의 어머니임을. 봄 산의 물가에서 우린 엽록소의 마술과 마주칩니다. 새로 갓 피어난 이파리의 어린 엽록소들은 빛과 물을 빚어서 유기물을 합성해 낸다고 식물학 책에서는 설명하지만,그 나무의 내면에서 그러한 빚어짐이 어떻게 이루어 지고 있는지,아니면 피할수 없는 어떤 운명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시간과 빛이 어떤 은밀한 밀애를 하는지, 이들이 빚어내는 작용의 질감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풍화의 시간을 이겨내고 피어내는 여름숲의 정경은 푸르름의 잔치로 시간을 잊은 듯 합니다.

 


내 마음의 사진기로 찍어낸 작은 꽃 이파리. 이 안에 숨겨진 아름다움에 눈물을 흘립니다.봄날의 피어나던 개별적인 이파리들이 여름의 시간속에서, 울창한 자신의 공동체들을 만들어내고 그 개별성은 아름다운 보편의 꿈 위에서,어우러집니다. 최근에 인도의 물리학자이며 철학자인 반다나 쉬바의 '살아남기'라는 책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그녀는 책에서 인도의 칩코Chipko(나무껴안기) 운동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그녀에 의하면 이것은 식민주의,남성 중심주의,개발주의,환경파괴,그리고 여성의 힘을 동시에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쉬바는 이 사건을 가리켜 <여성의 생태적 통찰력과 정치적,도덕적 힘>에 의하여 일어난 운동이기에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칩코 운동은 1970년대 초에 히말라야 산악 지대의 가르왈 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지역 여성들이 정부의 상업적인 삼림 개발 정책에 반대하여 나무들을 품에 안아 자신들의 목숨에 위협을 받으면서 까지 숲을 보호한 사건을 말하는데요.이 사건은 무엇보다도 영국이 소위 '과학적경영'에 의해서 인도의 숲을 식민지화 하였던 전철을 독립 인도가 계속 따라가게 되자 이에 저항하여 일어납니다. 인도뿐 아니라 아시아 권에서 숲이란 삶의 터전을 이루는 중심이 됩니다. 한국에도 배산임수라는 것이 있듯 산이라는 것이 나무와 동물의 사료 그리고 물과 신선한 공기를 제공해 주는 원천으로 보았던 거죠.


그런데 남성중심적인 개발정책에 의해 이숲들이 파헤침을 당하게 된 거죠. 그들은 인도 여성들에게 숲이 독립적인 경제 생활을 가능케 해주고 생존을 보장해주는 중요한 존재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아요.한국에서도 영광 원전 지역 임산부의 무뇌아 출산,골프장 캐디의 기형아 출산,낙동강 페놀 유출 사고시 임산부의 사산등을 통하여 환경에 대한 파괴가 여성에 대한 직접적인 파괴에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1994년 우장산 살리기 운동은 지역 주부들의 단결을 통하여 공권력에 대항하여 <신선한 산소 공급원이자 아이들의 자연 학습장>을 지키는 데 성공한 대표적인 운동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연에 대해 현명한 '청지기 윤리'를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제가 사실상 에코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바로 이런 청지기 윤리가 잘못 이해되어 하나님이 주신 뜻이 그릇되게 해석되고 있는 것이 마음 아팠기 때문입니다.분명 하나님은 자연에게 이름을 지어줄 수 있는 권한을 인간에게 주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였어요. 누군가를 호명한다는 것, 그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그에게 존재성을 부여하는 것.그리고 그의 존재성을 내 삶의 범주 속에 받아들이는 것.그리고 나서 평화로운 공존의 꿈을 꾸는 것.

 

저는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땅의 남정네들이 이 문장을 이상하게 해석하는 것 같더라구요.번성하고 생육하라고 했던 것을 정복하고 개발하라고 받아들인 거죠.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망각하게 된 겁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고 그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작업이 부재하게 된거죠. 사랑이 없는 개발.타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내 자신의 배를 채우는데 급급한 개발,어느새 절대자가 원했던 그 꿈은 그렇게 하나하나 반파되어 가고 있었던 겁니다.


분개하고 싶다고 기도를 올렸다가 다시 기도의 언어를 접습니다.왜냐하면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도 속속들이 환경 보호를 위한 단체들이 결성되고 있고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성과는 상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에서 에코 페미니즘이란 것을 이야기 하는 이유는아직까지 과학과 기술이 남성 중심적인 관점의 산물이라는데 있습니다. 남성이 주도하는 개발. 생명공학과 유전자 공학은 이른바 <유전자 오염>을 만들수 있는 가능성을가지고 있습니다. 더 나은 우생종을 만들기 위한 인간의 욕망......정말이지 끊이지 않습니다.이제 우리는 삶의 양식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전통적인 '남성/여성' 자연/문명'의 이항대립을 극복하고 나아가 절대자의 선한 의지를 읽고 따르는 일입니다.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수많은 다양성을 하나로 묶어 버리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할 때 자연은 우리에게 저항할 것입니다. 그 슬픔을 경험하고 싶지 않습니다.내가 자연을 불러줄 때 비로소 자연은 내게 다가와 꽃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