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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외국어대학교 파이데이아 특강-패션에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

패션 큐레이터 2018. 5. 25. 13:44



부산에 특강 차 왔다. 부산외국어대학교의 파이데이아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위한 강의였다. 이곳은 리버럴 아츠를 공부하는 학생들이다. 2년간 깊은인문학적 소양을 쌓은 후, 제2의 전공을 고르게 된다. 최근 패션계를 비롯, 세계 유수의 디자인 학교들이 자유교과과정을 밀도있게 확장하고 있다. 한 벌의 옷을 만드는 기술을 넘어 디렉터 능력을 키우고 전체적인 상을 그릴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하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점차 밀도와 깊이를 가져가는 시대, 인문학적 상상력과 실행력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뉴욕의 F.I.T나 파슨즈 같은 대표적인 디자인 스쿨도 패션전공자들에게 꽤 깊은 소양의 리버럴 아츠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리버럴 아츠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적어도 패션을 전공하는 이들이 리버럴 아츠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과 빛과 어둠이란 두 개의 세계, 이원적 체계란 점을 알리기 위해서다. 나는 툭하면 밝은 이야기만 하는 이들, 어떤 커리어를 만들 때 좋은 점만 말하는 이들을 경계한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도 플라톤이나 푸코같은 철학자 이름을 외우는게 아니라, 그들이 말한 사유의 방식이, 결국 당대 그들이 치열하게 풀어내고자 했던 문제해결의 입문이 되기 때문일거다. 패션을 공부한다고 맨날 런웨이만 열심히 보고, 패션컬렉션 정보만 분석한다고 해결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 돌아가는 거 알아야 하는 건 의상학도도 마찬가지다. 


그 세상의 일원이고 그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가야 하는 건 모든 이들의 보편적 운명이기에. 기하학과 예술론,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해, 이외에도 변화하는 성역할, 결혼, 가족 구성방식, 종교와 같은 인생의 큰 문제이자, 사회 내부에서 변화를 겪고 있는 큰 문제(Big Issue)들을 고민해야 한다. 왜그러냐교? 이런 고민거리들을 통해 변화해가는 인간의 태도는, 또 다른 옷입기의 태도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적어도 패션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왜 이게 필요한걸까? 이런 이야기들을 좀 더 깊게 했어야 했는데 아쉽다. 리버럴 아츠는 고대 그리스 이후로 중세 유럽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개발된 개념이다. 현대에 와서 리버럴 아츠를 공부합니다 라고 하면 자꾸 문과생이라는 이상한 연관관계를 떠올리는 분들이 계신데 아쉽다. 


실제적으로는 기초학문이라고 해야겠다. 말 그대로 자유교과다. 유연하고 비판적인 사고와 발상을 하는 인간은, 소통과 논의를 통해 삶을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믿음에서 나온 교육이다. 이런 리버럴 아츠에 예술과 디자인계는 항상 목말라있다. 한 시대의 디자인은 문제 해결을 넘어, 시대의 구성원들이 믿고 있는 신화, 체계, 기술의 정당성에 질문을 던지고, 이를 재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의상학 공부는 옷을 만드는 기술적 지식만 쌓는게 아니다. 시간이 누적되고, 디자인의 경험이 넓어지고, 더 큰 과제를 기업이나, 디자이너가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여러 매체들을 만져야 할때, 탐구정신과 재구성 능력이 필요한거다. 


모든 강의가 그렇겠지만, 듣는 청자의 스펙이나, 관심사를 명확하게 알면 알수록 나처럼 현업 전문가들은 더 많은 걸 줄 수 있는데, 조금 부족한 듯 싶어 내심 송구하다. 놀랍게도 강의 후 두 학생과 아주 진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문학을 전공하지만 한 친구는 영상을, 한 친구는 패션 스타일링에 관심이 많아서 해 줄 말이 많았다. 한 친구와는 아예 페친도 맺었다. 필요한 것들이 있다면 내가 아는 것들을 알려줘야지. 조금 더 잘할걸 하는 후회, 다음에라도 꼭 만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