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Travel/해를 등지고 놀다

유럽 영성기행을 마치고.....

패션 큐레이터 2016. 3. 2. 04:25



지난 2월 15일부터 28일까지, 유럽에 다녀왔다. 독일의 대도시와 소도시들, 프라하, 벨기에, 암스텔담, 파리와 랭스에 이르는 꽤 긴 여정이었다. 패션과 미술관 도슨트를 위해 떠난 여행이었지만, 생각지 않게 종교적인 느낌이 물씬 드는 도시들과 고적들도 둘러보았다. 사진 속 바트부르크Wartburg 성은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11주만에 번역한 곳이기도 하다. 성경을 번역했던 그의 서재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현대미술과 패션에 대한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컨설팅을 해왔지만 항상 느끼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현대'란 시간대의 탄생, 그리고 감성은 아주 오래전 이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걸 확신하고 오게되었다는 점이다. 


동일한 다음 여행코스를 가고 싶은 이들에게 좋은 안내자가 되고 싶어서 들르는 모든 곳에서 관련된 자료들을 사모았다. 이번 여행은 어찌보면 17세기 바로크에 대한 연구를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바로크적 경향이 패션과 디자인, 혹은 삶의 양식에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러가기 위한 여행이었는데 결국은 '종교적인 이해'의 깊은 바다에 빠져야했다. 이번 여행은 '잘 꾸려모아서' 여행기로 쓰고 싶다. 



바르트부르크 성이 있는 튀링겐 주의 아이제나흐라는 도시는 두 인물로 유명하다. 바로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마틴루터다. 뒤로 보이는 바흐의 집에 들러 바흐 당시의 악기들과 그가 연주했던 피아노의 전신들을 직접 연주해주시며 설명하는 큐레이터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인상적이었다. 음악과 영성이란 테마로 꽤 좋은 생각의 틀을 만들고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외에도 17세기 경건주의를 대표하는 모라비아 성도들의 공동체인 헤른후트도 갔다. 나로서는 종교개혁에서, 그 개혁이 시들해질때, 또 다시 내부에서 발원하는 개혁의 움직임과 세계를 향한 선교의 노력이 맞물리는 지점에 가보게 된 것이다. 감리교를 만들었던 요한 웨슬레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는 모라비안 성도들의 역사와 그 교회 공동체가 궁금해서 관련 서적들도 사왔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가 허드슨 테일러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보다 150년전에 이미 세상의 모든 오지에, 신의 말씀을 전하러 간 선교자들이 있다는 걸 이곳에서 알게 되었다. 작은 도시였으나, 큰 비전을 잉태하는 믿음의 도시 헤른후트였다. 



벨기에 앤트워프에선 루벤스에 푹 빠져 살았다. 루벤스의 3대 작품을 보며 사람들에게 의미를 나누어봤다. 그저 단순하게 작품 속에 담긴 형식미학적 요소 외에 이제는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좋은 출발인 것이다. 루벤스를 이해한다는 것은, 혹은 렘브란트를 이해한다는 건 그 당시의 역사와 미학을 공부하는 것을 넘어, 현재까지 의미의 자장을 가진 '정신의 얼개'를 본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감사했다. 



암스텔담에서는 렘브란트를 만나, 당시의 네덜란드 사회와 오늘의 우리를 비교해보았다. 도슨트 하기가 상대적으로 편해서 암스텔담 국립 미술관에 대한 인상은 아주 좋았다. 함께 해준 분들이 있어, 그림 한장 한장 현장에서 꼼꼼하게 풀어내며 시간을 보냈다. 캣워크를 소재로 한 패션전시도 열리고 있었는데 현대적인 작품들을 많이 못나눠서 아쉽다. 렘브란트의 야경을 눈 앞에서 보는 즐거움은 컸고, 우리사회와 대조해볼 요소들이 많아서 흥겨웠다. 



독일의 헤센주에서는 국립오페라단의 공연을 봤다. 17세기 바로크형식의 화려한 극장에서 펼쳐지는 오페라 공연, 나비부인을 관람했다. 한국인 소프라노가 주인공 초초상 역을 하는 초연에 가게 되어서 특히 감회가 컸다. 



한국분들의 활약이 크다. 음악감독을 맡고 계신 분도 한국분이고. 여행을 하는 것은 책을 읽는 일과 다를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터 벤야민은 책읽기과 매춘부의 공통점을 논했다지만, 나로서는 여행과 책읽기의 공통점이 더 와닿는다. 나 스스로가 생각하며 한발자욱씩, 지도 밖으로 거닐며 생각해낸 몫들이기에 그렇다. 예전 미술사를 혼자서 공부하던 시절, 중세미술에 대해 두껍고 머리아픈 책들을 기계적으로 섭취하며 공부한 적이 많았다. 요즘 유럽에선 사용하지 않는 옛 성당들을 아이스링크로 재개장하기도 한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럽에서의 기독교 전통이 허물어지거나 혹은 영성이 취약해지는 것이라고 보는 건 곤란하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부대에 술을 담는 예배의 형식들을 암스텔담에서 보았고, 그렇게 다시 한번 성장해가는 기독교적 영성의 현장을 살펴봤다. 예전에 읽었으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갔던 책의 구절들과 생각들을 구체화시키고, 정교하게 만들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여행은 그래서 재발견이고 성장인 것이다. 모든 것들을 함께 해준 이들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