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일상의 황홀

깊은 뜻은 형상 너머에 있다-유니스 황의 앨범을 듣다가

패션 큐레이터 2013. 7. 22. 15:13

 

 

 

 #1

유니스 황의 앨범이 도착했다. 블로그를 열심히 쓰던 시절, 표제어를 넣어 노래를 검색하던 버릇이 있었다. 달보드레한 봄날의 미풍이 곱던 어느날, 유니스의 피아노 곡을 우연히 찾아 들었다. 그렇게 팬이 되었다. 인터뷰를 신청하고 성곡미술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날, <하하미술관>을 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찾아온 그녀를 만났다.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꽤 오랜동안 산책동무가 되어, 서울 안의 길들을 걷고 걸었다. 만 4년만에 새로운 앨범을 들고 그녀가 세상에 나왔다. 

#2
풍경이란 무엇일까?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풍경이다. 내가 걸은 만큼만 풍경이 된다. 풍경은 순정품의 바람과 물과 햇살이 빚어내는 자연적 실루엣의 총체가 아니다. 사람이 풍경이고, 그리움이 풍경이다. 결국 풍경은 관계맺기란 행위를 통해 조형하는 의미의 풍경이어야 한다. "깊은 뜻은 형상 너머에 있다"라는 동양미학의 명제를 생각해본다. 흔히 "경생상외라고 부르는 말을 풀어낸 것이다. 당나라 유우석이 한 이 말이다. 의미의 풍경은 겉으로 드러나보이는 상 밖에서 생겨난다라는 뜻이다. 이때 의미의 풍경을 의경이라 한다. 그녀의 앨범은 선율로 짓는 의미의 풍경이다. 

#3
앨범을 듣는 시간. 느린 걸음으로 지면에 촉지하는 발의 감각 위로, 선율이 새어나온다. 일렁이던 마음은, 겨울을 지나온 봄의 청신함 앞에서 진저리친다. 사선으로 쏟아지는 세찬 소나기를 맞으며 그녀는 걸었을것이다. 비 개인 후, 물빛 어린 풍경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갈증으로 갈변했을지 모를, 의미의 풍경에 초록의 옷을 입히는 빗망울이 남긴 촉촉한 흔적. 작은 풍경은 그 자체로, 삶에서 빚어지는 풍경들이다. 우리들을 성장시키고 변화시키는 풍경인 것이다. 

#4
소녀는 자신의 생각이 곧 풍경이 되는 세계 속을 소요유한다. 어느덧, 시간의 입자가 오렌지빛 노을을 넘어 밤이 된다. 우윳빛 질감의 옷과 같은 구름을 살포시 벗어내는 달빛이 쏟아진다. 빗자루로 쓸어도 담을 수 없는, 햐얀 달빛 아래 소녀는 누군가를 서럽게 그리워했을지도 모르겠다. 유니스는 걷기(walking)란 행위를 영감의 시작으로 삼는다. 마치 19세기 파리의 아케이드를 걷던 댄디들처럼, 시간의 광폭한 움직임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애완용 거북이를 대동하고, 거북이의 발걸음에 맞추어 걷던 시인 보들레르처럼 말이다. 

#5 
터벅터벅, 어느덧 소녀의 걸음은 천년의 숲 비자림으로 향한다. 엉키고 엉킨 목질부엔 관계가 만든 혈흔이 선연하다. 소녀는 나무를 껴안고 울었을 것이다. 되뇌었을것이다. 이 작은 혈흔들이 모여 숲을 이룬다는 걸. 느리게 걸어야 이 피의 흔적들이 보인다. 

#6
세상의 모든 향은 나무와 바다의 결합품이다. 침향은 바닷물에 30년을 담근 나무의 옹이에서 나오고, 용연향은 고래의 토사물이다. 바다를 떠다니다, 햇살과 바람에 응어리진 상처가 견고하게 굳으면 세상에서 가장 비싼 향이 된다. 내가 지면 위에 찍어낸 걸음의 숫자만큼, 성장한다. 그 과정에서 만난 이들에게 보내는 감사는 필수다. 살아오며 내가 이룬 모든 걸, 다 내 것인양 포장하는 인간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만든 세계가 오롯이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한다.

#7
한번쯤은 세상은 이런 자들에게 속아 자신의 속살을 열어준다. 하지만 두번째부터는 그들도 속지 않는다. 결국 그녀/그는 자신의 의미를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거짓말을 해야 한다. 이 땅에는 이런 아티스트들이 꽤 많다. 어디 아티스트 뿐이겠는가. 인간세상의 풍경을 쪼개어보면 어디에서든 만나게 되는 풍경이겠지. 감사의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자는, 저 하늘도 이 지상도 감동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감사의 마음은 창작의 실제적인 기본이 된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의 친구들, 함께 연주해준 해금주자, 앨범이 나오기까지 함께해준 작은 손길과 호흡에, 그녀는 감사를 보낸다. 나 또한 이러한 감사에 또 다른 감사로 인사하고 싶다. 상호에 대한 감사. 그러고 보니 유니스 황을 알게 된지도 5년이 넘어간다.  

1. 일렁이다
2. 겨울을 지나온 봄
3. 소나기
4. 비 개인 후
5. 달의 노래 (해금연주 양희진)
6. 꽃비 내리던 날
7. 비자림에서
8. 노을, 물들다
9. 바다는 그렇게 대답했다
10.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