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투명인간이 되는 법-현대중국작가 류 볼린의 독특한 작품들

패션 큐레이터 2013. 1. 12. 06:00


중국의 현대작가 류 볼린(Liu Bolin)의 도록을 읽고 있습니다.

그의 전시 제목은 Hiding in the City인데요. 말 그대로 도시의 면면에 

투명인간 처럼 숨은 작가의 모습이 보입니다. 배경에 맞추어 신체를 채색한 

탓에 철저하게 위장복을 입고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발산합니다. 



류 볼린은 1973년 샹동 지역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지금껏 

<The Invisible Man: 투명인간>이란 사진 작업으로 국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2005년 예술가들이 함께 모여사는 마을을 정부가 강제로 철거하면서 

이에 대한 침묵시위의 일환으로 투명인간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이를 사진으로 다큐멘트화 

한 것이지요. 문화대혁명의 폐허에서 급속한 경제성장 아래 자란 세대답게 정서적으로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과 저항이 강했습니다. 저는 Invisible Man이란 표제를 들었을 때, 1952년에 소설가 랠프 앨리슨이 

발표한 소설 『Invisible Man』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50년대 초반의 미국 사회에서, 아프로 아메리칸이 겪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체험에 대해 적고 있죠. 흑인들의 민족주의를 비롯하여, 흑인의 정체성과 마르크스 주의, 당시 

흑인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교육자 부커 워싱턴의 개혁주의적 인종정책에 이르기까지

현대 미국사회에서 흑인의 자리, 그들만의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비슷한 일면이

많습니다. 류 볼린의 시선과 겹치는 부분도 아주 많고요. 참 비슷합니다. 



1998년 첫 베이징 전시를 마치고 그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의 사진 및 조각 작업은 프랑스 아를르에서 열리는

랑콩트레 현대 사진 페스티벌을 비롯하여 다양한 곳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베이징의 예술특구 따산쯔에서 2007년 전시를 했고, 현재 자신의 후원자이자 관리자인

뉴욕 첼시의 엘리 클라인 파인아트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도시 내부의 공간을 자신의  신체와 

결합한 작품들은 계속 반응이 좋아서, 2011년에는 Hiding In New York으로 뉴욕을 배경으로 한 연작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뉴욕의 주요 지구에서 동일한 퍼포먼스를 하며, 사회 속에서 지워진 

예술가의 지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죠. 사회적 존재로서의 예술가의 초상입니다.



제가 류 볼린의 작업을 보고 흥미를 느꼈던 것은 그가 사진을 

통해 현대 미술계, 적어도 중국정부의 문화정책에 맞서기도 하고 혹은

저항하면서 보여준 예술가의 이미지에서, 우리시대의 또 다른 아픔을 발견하기

때문이지요. 잊혀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번 대선 이후, 많은 노동자들이 자살했습니다

언론은 그들의 죽음에 관심을 갖지도 않고,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왜 일까요? 그들은 이미 사회 속에서 지워진 사람들이어서일까요?

투명인간이 된다는 것은 신체의 분자구조가 모두 투명해서 빛을 투과하거나 

튕겨내기에 가능합니다. 하지만 투명한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아무도

기억되지 않는 자의 죽음, 흔히 호모 사케르라 불리는 존재는 지금 중국만이 아닌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지요. 고독사로 죽어가는 이들, 외로움과 가난에 겨울 한기를 떨쳐내지 

못한 채, 쓸쓸함을 온 몸으로 새기며 죽어가야 하는 이들, 사회가 기억하지 않는

이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과 그 조건을 물어야 합니다. 


죽음에도 서열이 있는지 질문을 던져야 할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평생 타인에게 해를 입히고 칼질을 해댄 조직폭력배 보스의 죽음과 자살한

유명 여배우의 죽음은 연일 언론이 보도합니다. 물론 이들의 죽음 또한 애도의 몫을

충분히 가질만 합니다. 그런데 23명이 이어 자살한 기업의 해직자 가족과 송전탑에 올라 절규하는

그 과정에서 죽어가는 기억되지 않는 자들의 죽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류 볼린이 작업한 사회적 환경들은 실제 

손을 이용한 노동을 하는 이들이 모여있는 장소도 많이 포함

되어 있습니다. 그는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보통 10시간 정도의 

준비시간을 갖습니다. 그의 몸은 텅빈 캔버스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심지어 작업을 마친 후, 그곳을 지나가는 통행자들 조차 그가 환경 속에 있는지를 

찾지 못할 만큼, 정교한 작업입니다. 그의 작업이 놀랍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쓸쓸하고 애잔한

정서를 보여주는 것은 도시의 한 구석, 투명한 존재로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고 

스스로를 주체적으로 가린 인간의 모습을 보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시대는 투명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투명성이 사회의 건강성을 

확보하고 증진시키는 열쇠말이라고, 그래서 사회의 각 부분에서 쟁취해야 할

가칭 중 하나가 바로 투명성이라고 말입니다. 이는 삶과 인간의 행위 전반에 투명함이 가져다

주는 긍성성에 대한 찬연한 확신일 것입니다. 반복해서 강조하듯 투명성과 Invisible(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먹고 사는 투쟁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숙명이라고 말하기엔

그저 '희망은 어디엔가 있다'란 식의 유사 힐링으로 사람들을 혹하기엔, 사회적 

불투명성이 극에 달하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회적 불투명성과 싸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투명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투명인간이 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내적 개혁을 이뤄내는 존재로 성장하면서

사회의 아픈 환부를 돌보고 이를 위해 연대하는 인간으로 성장해야 함을 뜻합니다. 결국 책상

머리에 앉아서 사회의 변화를 외치는 것은 삶에 대한 개인의 방치라는 생각을 합니다. 



자존심 한복판으로 / 숭숭 뚫리는 가슴 / 보고도 안 보이는지 / 알면서도 모르는지

그냥 지나쳐 버린다 / 조붓한 어깨 위로 / 쏟아지는 경멸 / 목석처럼 무심하여 / 상처받은 자아는

구석으로 내몰리고 / '저 여기 있습니다' / 팻말 꽂아 놓고 / 친구가 그리워 / 발버둥 치는 / 슬픈 투명한 인간


시인 공석진의 「투명인간」이란 시를 읽는 시간, 우리 사회 어디엔가 '저 여기 있습니다'란

푯말을 걸어놓고 말을 건내주길 기다리는, 잊혀진 자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그들의 투명한 표피에 희망의 연두빛 채색을 해줄 붓이 있을까요? 해답은 여러분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