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런웨이를 읽는 시간

뉴욕에서 만난 배우 다이안 키튼-전설의 패셔니스타를 만나다

패션 큐레이터 2011. 9. 16. 17:28

 

 

대학시절, 항상 내곁에는 오빠라는 호칭보다, 형이라고

부르는 여학생들이 많았다. 같이 연극을 만들고 힘들게 밤샘작업을

하며 이성이란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터라, 그런 호칭은 아주 자연스럽기만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보이쉬한 매력을 풍기는 여자에게 곧잘 끌린다. 과도한

여성성을 발산하는 것 보다, 단순하면서도 결단력있는 모습과

의사결정력을 가진 인간은 성차에 상관없이 멋지다.

 

 

올 2011년 폴 스미스의 가을/겨울 컬렉션을 선보이는

런웨이에는 마치 남자친구의 옷장에서 훔쳐온 듯한 옷을 입은

늘씬한 모델들로 북적댄다. 인디언 섬머가 여전히 풀 죽지 않고 남은 여력을

토하는 요즘, 뉴욕의 뙤약볕 아래 보낸 망중한의 시간이 그립다. 왠 뜬금없이 뉴욕 이야기를

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여행에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 전시를 보러 갔다가, 그곳에서

배우 다이안 키튼을 만났다. 키튼이란 이름.

 

 

처음엔 어렴풋이 낯이 익다는 생각만 했는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있길래, 따라가서 물어보았다.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사진을 찍느라 부산한 가운데, 나 또한 부탁을 해서 어렵사리 한 컷 찍었다. 4명의 아이들과 함께 미술관을 찾은 그녀의 모습은, 옛날 영화 속 당당하고 때로는 요염한 역도 곧잘 해내던 이미지와는 달랐다. 그러나 세월은 그녀의 자태를 곱게 빗어았다고 자부한다.

 

연기력이 좋은 배우는 시간이 흘러도 기억된다. 사진을 찍자마다 페이스북에 자랑이라도 할 요량으로 올렸더니, 댓글 또한 참 곱다. '그녀처럼 나이 주름이 고운 배우도 없지 싶다' '그녀만큼 크림색 터틀넥 스웨터가 잘 어울리는 여자를 보지 못했다' 등등이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애니홀』에서 근사한 넥타이와 헐렁한 셔츠,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나와, 한 순간에 앤드로지너스 룩을 유행시킨 장본인이 아니던가 말이다. 이제 60세를 훌쩍 뛰어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뿔테안경을 쓰고 검정색 수트를 받쳐입은 그녀의 모습이다. 내가 그녀에게 건낸 한 마디는 다름이 아니다. "나는 애니홀의 팬이었다고, 영화 속 패션으로, 연기로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오죽하면 뉴욕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영화 『애니홀』을 다시봤다. 사실 알렉산더 맥퀸의 전시 오프닝 갈라 쇼에는 유명한 배우들이 거의 다 왔다고 봐야 한다. 사실 5월 전시 시작에 맞추어 미국에 갔더라면 갈라 쇼에 초대를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사라 제시카 파커를 비롯하여 나오미 캠벨, 다프네 기네스, 메리 케이트 올젠, 마돈나 등 일일이 셀 수도 없다. (메이크업 안한 생얼로 찍은 모습을 보고 아닌 것 같다는 둥의 발언은 삼가하자)

 

 

그녀가 영화 <애니홀>을 통해 유행시킨 매니쉬룩은 30년이 지난 지금, 회사의 큐비클에 갖힌 채, 경쟁에 내 몰린 이 땅의 여성들의 패션 코드다. 당시 랠프 로렌이 의상을 맡아서였던지, 영화 속 그녀가 입은 랠프 로렌의 상의와 통 넓은 와이드 팬츠, 여기에 도트가 촘촘하게 박힌 넥타이 하나. 그녀의 룩은 그 자체로 패션의 역사에서 일종의 아이콘화 되어 버렸다.

 

 

영국의 남성복 디자이너 출신의 폴 스미스는 원래

사이클링 선수가 되는게 소원이었다고 한다. 사고로 꿈을 접고

영국의 전통 수트 제작을 배우며 패션계에 뛰어들었다.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은 일본이었다. 당시 영국 출신 디자이너들의 패션에 흠뻑

빠져있던 일본의 패셔니스타들은 그의 옷을 속속 사입었다.

 

 

물론 중국풍의 영감을 그대로 실어낸 작품도 보인다.

 

 

서양의복구성에 동양의 패턴이나 무늬를 인각하는 건

이미 로코코 시대부터 시작된 서구의 '동양따라잡기'에 다름 아니다.

 

 

기존의 블레이저를 벗어버리고 살포시 가벼운 가디건을

어깨 위에 걸친 매니시한 여자들이 런웨이를 장식한다. 오히려 아일랜드 풍의

단화와 양말을 보이기 위해, 짧게 걷어올린 바지가 눈에 띈다.

 

 

폴 스미스의 편안한 디자인......

마치 내 남자친구의 옷장을 뒤지다

그저 편안하게 입고 싶은 옷을 골라온 듯한 느낌이다.

 

 

패션은 유행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소비자들의 취향에는 변화가 발생한다. 변화는 새롭게

잉태된 취향을 표현하려는 패션의 요구와 맞물리며 시대정신을 담는다.

사실 다이안 키튼이 입었던 매니시 룩, 흔히 유니섹스 룩이라 불리는 것도 사회에 대한

심리적 반응기제가 담긴 옷이다. 좌파와 우파의 갈등, 그 속에서 끊임없는 성장에의 요구, 기업조직의

혁파, 영화 애니홀이 탄생했던 30년 전의 모습은 지금 이 땅의 여성들이 기업 내부에 진출하며

조직위계의 표면에 균열을 내는 시대의 첫 시작이었다. 폴 스미스의 옷은 여전히

변화의 과정 중에 있는 여성들의 입장과 태도를 묻는 듯 하다.

'당신은 지금 어떤 옷을 입을 거냐고' 물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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