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이 좋다, 삶이 좋다
서른 살이 되던 해, 시작했던 발레수업. 지금 대지진으로 고통받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그곳 발레센터에서 발레를 배웠다. 몸 구석구석에 쌓인 누적된 관성의 시간을 털어내는 경험은, 내가 무용의 가능성에 대해 눈뜨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공연예술을 좋아해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섭취하고 다녔다. 발레와 오페라, 현악4중주, 뮤지컬, 연극에 이르기까지. 어떤 장르던 꼭 맡고 싶은 배역/역할이 있기 마련이다. 연기를 공부하던 대학시절, 남자는 햄릿을, 여자는 오필리어를 맡고 싶은 건 인지상정. 오늘 소개하는 발레 <지젤>의 주인공 지젤은 모든 발레리나의 꿈이다. 이것 때문에 몸을 찟고 바 워크를 감내하고 매일 몽환 속에서 현실의 육체적 고됨을 버틴다. 많은 첼리스트들이 요요마와의 협연을 꿈꾸는 것도 같은 이치겠지만 말이다.
이번 국립발레단 <지젤>은 4일 동안 전석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3일 내내 보러 다니느라 정작 신문사에 리뷰 조차 기고를 못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페이스북 친구인 발레리나 김주원은 예쁜 쪽지를 보내주었다 "두 달동안 지젤로 살다가 현실로 돌아가려니 너무 버거워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 연극도 오페라도 무용도 마찬가지다. 혼신을 다해 자신이 구현해 놓은 캐릭터를 놓아야 할 때, 크게 앓는다. 공연을 3일 연장 보고 난 후 관객인 나도 앓아눕는데 오죽하겠나 싶다.
지젤.....낭만주의 발레의 정수
1841년 6월 28일 파리에서 초연된 이래 1세기 이상 꾸준한 사랑을 받은 발레 <지젤>. 첫날 공연에서 10차례 넘게 이어지는 커튼 콜에 맞춰 미친 듯 박수를 친 기억을 뒤로 하고 이제 작품 속으로 들어가보자. 지젤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보다 발레리나에게 이중적인 측면을 연기하도록 추인하는 이야기 구조에 있다. 2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1막에선 포도수확축제에 맞춰 춤을 추는 시골 처녀 지젤이 등장한다. 병약하지만 춤 추기를 좋아하는 그녀는 축제의 시간, 한껏 부풀어오른 명랑함을 춤을 보여준다. 2막으로 가면 그녀는 죽음을 맞이한 후 명계의 정령이 된다. 상반된 성격을 구현해야 하는 극 구조다 보니, 발레리나에겐 이중의 부담도 되지만 발레리나의 위대성이랄까, 연기능력을 극대화시켜 보여주기엔 이보다 좋은 작품도 없다. (그나저나 이번 공연에 등장한 사진 속 개 두마리.....정말 인상적이다)
(말로만 듣던 개콘의 발레리노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길^^)
독일, 처녀귀신들이 날뛰는 나라(?)
<지젤>은 시인이였던 테오필 고티에가 독일의 시인 하이네가 쓴 민화집<도이칠란트에 관하여>에 나오는 처녀귀신, 윌리에 관한 내용을 읽다가 영감을 얻어 완성한 작품이다. 윌리는 숲 속의 정령들이다. 이 정령은 지상에선 아리따운 아가씨로 살았으나 결혼하기 전에 죽게 되어 귀신이 된 존재들이다. 이들은 쉴새없이 춤을 추어야 하는 운명에 처해진다는 전설 속 정령으로, 남자를 숲으로 꽤어 동일한 수법으로 죽인다. 24시간 댄스베틀로는 해결이 안되는 이들이다. 처녀귀신이 무섭긴 한가 보다.
1막이 시작되면 포도수확축제를 위해 모인 시골 처녀/총각들의 춤이 펼쳐진다. 시골청년 로이스로 분장한 공작 알브레히트, 바로 지젤이 한 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남자다. 대한민국 막장 드라마에선 온통 신분을 넘어 '상승'의 욕망만을 변주하기에 바쁜데, 안타깝게도 지젤에선 그게 안 통한다. 지젤을 짝사랑하는 또 다른 청년 힐라리온의 계략에 빠져 알브레히트가 정혼자가 있는 남자인 것을 알게 된 지젤. 좌절된 사랑의 끝은 충격에 의한 자살로 연결된다.
김주원과 김지영, 이은원 세명의 지젤을 차례대로 만났다. 김주원과 김지영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발레리나다. 둘이 보여준 해외에서의 성과는 눈부시다. 내 눈에 들어온 또 다른 발레리나가 있으니 이은원이란 신예다. 영재로 뽑혀 한예종 무용과를 졸업한 어린 이 친구의 발사위가 눈에 들어왔다. 서구의 발레는 유독 하체에 중심점을 둔 예술이다. 발끝으로 서고 도약하고 뛰고 돈다. 이 과정에서 발레연기자의 전인적인 '동선'과 감정표출이 가려질 때가 많다. 현란한 발레리나의 발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주원을 비롯한 3명의 지젤은 광기에 찬, 슬픔을 억누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 여인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서양사를 통해 볼 때 무용이 찬밥신세가 된 것은 중세부터다. 교조적인 기독교가 자리하면서 로마시절, 윤무(강강수월래처럼 돌면서 추는)를 추며 신에게 예배하던 풍속을 이단이라고 치부하면서다. 예배할 때 인간의 동선을 보면 주로 하늘을 향해 기원하는 것은 손을 비롯한 상체가 한다. 중세 이후 상체를 사용하는 기술은 점점 더 세파에 밀려 지워지고 귀족들의 놀이문화로 자리잡은 발레는 발 기술을 이용한 묘기가 주를 이루게 된다.
1막의 열정적이고 발랄한 농촌 처녀 지은 2막에선 정령으로 분한 환상의 존재로 변한다. 두 시/공간을 넘나드는 배역은 그만큼 짧은 시간 안에 새로운 성격화의 옷을 입고 벗고를 반복한다. 2막이 시작되면 윌리가 된 지젤은 윌리들의 수장인 미르타에 의해 그를 유혹해 죽여야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용해한다. 알브레히트를 죽음으로 몰고 가려는 윌리들의 춤 공세를 온 몸으로 막아내 그를 지킨다. 한 여인의 내면속에 배어있는 두 가지 힘, 천상과 지상을 매개하는 능력을 표현한다. 지젤의 매력이 발산되는 순간이다.
윌리들의 춤에는 귀력이 숨쉰다. 백색 튀튀 치마를 입은 발레리나들의 군무에는 마치 하얀 달빛 아래 무한의 파랑을 그리는 바다의 무늬가 녹아있다. 입 안에서 녹아드는 스위스산 초콜릿 퐁듀처럼 보는 이들의 시각을 달콤하게 적신다. 발레작품에는 유독 이 백색의 치마를 입고 나오는 신이 많다. 19세기 초반에 시작된 낭만주의 발레의 영향이다. 이 당시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이 나폴레옹 혁명으로 끝났음에 좌절했다. 지식인들은 하나같이 꿈 속으로 도피했고, 몽환의 힘으로 현실의 무게를 버텨나갔다. 고티에의 고증작업이 독일판 <전설의 고향>을 따라간 것도 이런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신부와 백설기 같은 눈, 안개와 새벽, 햐얀 달빛과 백조의 이미지, 이 모든 것들이 순백을 동경하던 낭만주의 시대의 정서다.
이번 무대의상은 루이자 스피나텔리가 새롭게 디자인했다. 감각적이면서도 고혹적인, 백색의 순수에 감춰져 더욱 강한 에로티시즘이 드러난다.
시인 보들레르는 지젤의 2막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여기 밤이 오네 꽃들이 제각기 가지 위에서 바르르 떨면서 꿈을 피워내는......" 그의 시 속에서 밤의 세력은 우리를 둘러싼 상처들의 풍경일거다. 시대의 상처를 현장에서 맞닿드리며 싸우기 힘들었던 그때, 시인은 몽환 속에서 달빛 아래 피어나는 작은 생명의 순간을 기록하고 싶었나 보다.
우리는 낭만적이다란 말을 함부로 한다. "낭만적"의 영어는 로맨틱이고 그 해석어는 다시 낭만적이라고 읖는 동어반복을 계속한다. 왜 인간은 꿈을 꾸며 그 속으로 도피해 가야 했을까? 낭만주의의 배후에는 이 상처에 대한 처절한 의식이 남는다.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글을 쓰고 무용을 하고 음율을 튕긴 자들. 지젤의 사랑이 꿈속에서라도 '사랑하는 이를 지키는 것'으로 끝맺음 하는데는 이런 이유가 있을거다. 현실의 삭막함 속에, 앞이 보이지 않는 이들을 위무하고 다시 한번 꿈꿀 수 있는 희망을 주는 '낭만의 꿈'을. 김주원과 김지영, 그리고 이은원이 맡은 지젤. 전석매진이 되는 상황이 지속되길 바란다. 정말 예전 같지 않다. 맨날 보는 사람만 보고, 초대권으로 보던 발레공연이 아니다. 점점 무용을 진실로 좋아하는 팬층이 두꺼워진다는 건 매력적이다. <웃어라.....발레야> 같은 제목의 책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내가 쓰고 있다)
주원, 지영, 은원.....내 사랑하는 춤의 영혼들이여 영원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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