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y ⓒ Cidance Association & Wikipedia
춤, 세상을 비평하는 또 다른 창
Dance, Share the Body & World
서울 세계 무용 축제의 다양한 작품 중, 오늘은 포르투갈의 대표적 안무가 베라 만떼루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지난 포스팅 때도 말씀드렸듯, 무용은 '몸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를 탐색하는 예술입니다. 이때 여자 무용가의 몸은 남자의 욕망 어린 응시를 끌어내는 에로틱한 몸이 아닌, 사회를 향한 발화의 장이 됩니다. 굴벤키안 발레단에서 고전무용을 했던 베라 만테루는 현대무용으로 전향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표현의 수준과 폭이 현대무용에서 훨씬 더 넓기 때문입니다. 물론 발레 전공자들은 그녀에게 테크닉을 기대하고 공연을 보러 왔다고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세 가지 소품으로 구성된 이번 공연은 현대무용이란 장르의 지향점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바로크와 로코코를 거치며 철저하게 귀족문화의 일부로서, 근대에 들어오면서 부르주아 계층의 유흥이었던 춤이, 과연 세상을 향해 독설을 품을 수 있는가? 혹은 몸이란 매개를 통해 세상을 향해 발언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첫 번째 작품 <알수 없는 한 가지라고, 커밍스는 말했다>는 흑인 무용가이자 가수였던 조세핀 베이커의 생애와 예술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오른쪽 사진의 주인공이 바로 그녀입니다. 흑인으로서 미국에서 출생한 그녀는 흑인민권운동에 참여하는가 하면 2차 세계 대전 당시엔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후원하기도 했죠. 파블로 피카소와 크리스티앙 디오르,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그녀의 팬이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구리빛 비너스'라고 불리웠지요. 첫 작품을 자세히보면 그녀의 몸은 인간이 아닌 염소의 다리를 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 공연이 끝나고 안무가와의 대화에서 제가 직접 질문했습니다. "염소는 길들이기 어려운 동물이다. 흑인여성으로서 당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무용가의 삶을 거칠게 표현하기 위해 염소의 다리를 한 그녀"를 표현했다더군요.
조세핀 베이커는 카바레, 버라이어티 쇼에 단골 메뉴인 나체에 깃털을 꽂고 춤추는 방식을 처음으로 만든 인물이었습니다. 무용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부정적인 단어'들의 연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불가능, 부재, 좌절, 상처, 잔혹....." 답답한 단어들이 그녀의 입으로 계속 흘러나오죠.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가부장적인 근대의 서부유럽의 무대를 살아가기 쉽지 않았을것입니다.
두 번째 작품은 <어쩌면 그녀는 먼저 춤추고 나중에 생각했을지도>란 작품인데요. 이 작품은 모든 창작은 우연에서 시작된다는 명제를 몸으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창작한다라고 할 때, 철저한 철학을 기반을 둔 요소들의 결합을 떠올리기 쉽습니다만, 그녀는 벨기에에서 열리는 '유럽 알리기' 행사에서 포르투갈의 문화를 소개하기 위한 소재를 고르던 중, 포르투갈의 전통문화를 찾아내 몸으로 표현합니다. 무대를 보면 4개의 알콜램프가 있고 그 위에 왁스로 만든 발 조각이 올려져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각들은 흘러내리거나 녹죠. 이때 발 조각은 희생을 의미하는 상징인데요. 포르투갈에서는 몸이 아플때 왁스로 아픈 부위를 만들어 교회로 가져가는 습속이 있답니다. 이걸 표현한 것이라고 해요.
오늘의 메인 공연은 세번째 <올랭피아>입니다. 올랭피아.....어디서 많이 들어온 이름 같습니다. 그렇죠. 인상주의 화가였던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그 올랭피아입니다. 19세기 말, 오스망 남작이 오늘날의 파리를 12개의 방사형 길을 내며 재건축하던 시절, 신흥 부르주아 경제가 발흥하던 그때입니다. 마네는 도덕적인 관점을 자신의 그림에 투영시켰던 사람입니다. 맨날 인상주의 그림이라고 하면 샤방샤방하게 웃는 아이들 표정이나 햇살아래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떠올릴 뿐이죠. 하지만 마네는 당시 새롭게 재편되어가던 파리의 모습에서, 뒷골목에서, 술집과 매춘이 날뛰는 도시 파리에서, 어두운 삶의 이면을 봤습니다.
이런 사회적 측면을 뒤로하고 여전히 화가들은 돈 있는 자들을 위해 신화와 역사를 그렸습니다. 아카데미 미술이란 미명아래요. 이들 또한 누드화를 그렸지요. 정작 이 누드화의 모델은 거리의 잡부이거나 매춘부들이면서도, 그녀를 신화 속 비너스로 포장해 그리는데 급급했습니다. 마네는 이런 웃기지도 않은 위선을 비웃습니다. 이 <올랭피아>는 매춘부를 포장하지 않고 진짜 매춘부로 그려냄으로서, '젠 체'하는 파리 부르주아들의 도덕적 위선을 까내려가죠. 당대에 얼마나 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을까요? 인상주의 그림이 지금은 우리들의 신화가 되었지만, 발흥 초기 철저하게 당시 아카데미에서 배제된 까닭이기도 합니다.
어느 사회나 그렇습니다. 모든 예술가들이 세상을 향해 독설을 날리는 건 아니죠. 권력층을 비호하고 미화하고, 들러붙어 먹고 사는 양촌리 이장댁 같은 예술가들이 오히려 대세죠. 그러나 미술사는 마네의 그림을 기억할 뿐입니다. 역사는 시대를 거슬러, 말해야 하는 것을 발언하는 자를 기억합니다. 이 진실이 무너지면 세상은 존속될 수 없습니다. 지금 한국사회의 정치적 부당성에 저항하는 이들이 살아남는 이유입니다.
그녀의 무용을 보니 화가 장 뒤뷔페의 <질식시키는 문화>의 한 부분을 계속해서 낭독합니다. 대각선으로 무대를 가로지르며 걸어오는데 자신의 침대를 직접 줄로 묶어 끌고오는 것이죠. 마네가 <올랭피아>를 통해 여성의 나체를 미화해 신화로 만드는 못된 수컷들의 같잖은 욕망을 비판했다면, 베라 만떼루의 작품은 여전히 지금까지도 여성에게 투사하는 다양한 '이미지'들을 몸을 통해 뒤집고 풀어냅니다.
찌라시 스포츠지 기자들이 마네의 올랭피아를 당시에 봤다면 어떻게 기사를 썼을까요? <그녀의 화려한 뒤태, 그 끝은 어디인가><유혹의 S라인, 머리부터 발끝까지...> 뭐 이 따위 표제가 붙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작품을 보고도 뭐랄까요? 참 궁금합니다. 이래서 시선이 중요합니다. 사물과 풍경에 내재되어 있는 생명, 건강한 삶을 위한 비판, 풍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귀 기울이며 상처의 무늬를 읽는 것이죠. 시선을 내부로 파고들수록 사물은 더 쉽게 몸을 열어줄테니까요. "뭐 눈엔 뭐만 보인다는 말"만큼 무서운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시선은 이 작품에 어떤 제목을 달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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