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향으로 승부한다
나는 향수를 좋아한다. 아니 향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향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몸에 향의 기운이 붙는다. 처음의 강렬함은 시간이 지나며 우아함으로 변모한다. 랑콤 트레조 향수의 모델인 스페인 출신의 배우, 페넬로페 크루즈. 나는 그녀를 좋아한다. 부드러움과 강함, 흑과 백, 부드러움과 단단함 같은 이질적인 속성을 함께 껴안아 몸으로 체현해내는 그녀의 이미지에 홀렸다. 향은 자체가 '비가시적'이다 향을 통해 특정한 '이미지'로 치환된 사람을 기억하는 습성을 가진 인간에게 '향수'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다. 솔직해지자. 현학적인 말로 발빼지말고. 그래 난 스페인 여자가 좋다. 왜? 대담하고 섹시하다.
어제 오페라하우스에서 유니버설 발레단의 <돈키호테>를 봤다. 17세기 스페인의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이 돈키호테를 통해, 억눌려 있던 사회의 단면들을 드러냈었다. 그의 광기를 빌어 사랑의 자유, 종교의 자유, 재판의 자유등을 말했다는 걸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발레 <돈키호테>는 문학작품의 줄거리를 따라가지 않는다. 시각을 비롯한 인간의 오감이 유럽 속의 동양이라 불리는 이국적인 스페인의 풍취를 느껴야만 이 작품의 이해가 가능하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돈키호테>는 마리우스 프티파 안무를 근거로 알렉산더 고르스키가 개작한 버전을 다시 구성했다. 고르스키는 1900년 근대와 현대의 갈림길에 서 있는 시대의 어둠과 빛, 그 양면의 풍경을 경험하며 작품을 통해 고전적인 엄격함 대신 스페인의 생기있고 열정적인 분위기를 되살렸다. 춤을 통해 시대의 색감을 파스텔로 그려낸 것이다.
발레 <돈키호테>는 가난한 이발사 바질과 그의 연인이 선술집 딸 키트리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돈키호테는 실제 작품에선 매우 보조적인 역할만 할 뿐이다. 3막으로 구성된 다채로운 이야기로 채워진 발레 <돈키호테>는 여타의 발레작품과 달리, 스페인풍의 섹시함과 강렬함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1막이 오르면 기사소설을 읽으며 그 세계에 빠져사는 남자, 환상의 여인 둘시네아를 찾아 세상의 위험으로 부터 그녀를 구하겠다며 모험의 길을 떠나는 돈키호테의 모습이 보인다.
바르셀로나의 화려한 거리와 현란한 색채가 눈길을 끈다. 템버린과 캐스터네츠, 부채를 든 여인들은 그 자체로 섹시의 아이콘이다. 선술집 주인의 딸 키트리와 그녀의 아버지 로렌조. 가난한 이발사를 사랑하는 그녀가 뭇내 못마땅한 아버지는 점 찍어둔 사윗감을 데려다 선 보인다. 멍청하지만 돈 많은 귀족 가마슈다. 아버지의 어리버리한 협박에 못이겨 자살소동을 벌이는 로렌조와 그와 함께 집시의 야영지로 도망가는 키트리. 스페인의 집시춤은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기 힘들 만큼, 강렬하고 이원적인 힘들이 충돌한다. 이후 돈키호테에게 자신들의 결혼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하고, 끝내는 꿈을 이룬다. 이야기는 단순하기 그지없다. 모든 발레작품은 이상하리만치 사랑 이야기에 매몰되어 있다. 한 두번 글을 쓰다 보면 지치기도 하고 지겹다. 그러나.....발레를 이렇게 읽으면 안된다. 돈키호테만큼 남녀 주역 모두에게 고난이도의 현란한 기교를 요구하는 작품도 드물다. 32번의 푸에테(회전동작)과 이어지는 점프 동작을 보고 있노라면 눈이 부실 정도다. 발레리나가 점프하는 순간, 붉은색의 고혹적인 드레스가 공중에서 춤을 춘다. 그녀의 몸도 옷과 함께 녹아내린다. 옷을 입고 있어도 마치 내겐 나신의 여인이 보인달까? 스페인 여자들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여자의 작업도구-캐스터네츠와 부채
이국적인 매력이 넘쳐나는 캐릭터 댄스, 플라맹코와 집시의 춤은 지금껏 발레공연에서 본 규정된 동작들과 다르다. 깊이와 색채는 육감적인 매력을 동반한다. 여인들이 들고 있는 부채와 캐스터네츠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채를 들고 추는 세기디야는 원래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 기원을 둔 대중적인 춤곡으로, 스페인 특유의 강렬하고 정열적인 무용이 특징이다. 비제의 카르멘 제2막에 나오는 '세기디야'가 유명하다. 아바니코라 불리는 스페인의 작은 부채는 원래 중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가 변용된 것이다. 부채는 패션 액세서리로 사용되면서 문화적 의미까지 함께 갖게 되는데, 바로 은밀한 유혹을 위한 작업의 도구다. 접기, 반쯤 펼치기, 완전히 펼치기를 기본으로 신체부위에 갖다대거나 혹은 부치는 속도에 따라, 여인들의 속마음을 전달하는 도구였다. 접은채로 손바닥을 내려치면 '나를 뜨겁게 사랑해주세요'란 뜻이다. 활짝 펼친 채 천천히 부치면 기분이 좋다는 뜻도 되고, 남정네들의 작업을 우아하게 거절하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됐거든요'란 뜻이다.
빨강색 망토를 흔드는 투우사들의 정열적인 '토레아도르'춤이 펼쳐진다. 토레아도르는 투우사란 뜻의 스페인어다. 사람들은 그저 발레하면 백색발레의 지존인 지젤이나 백조의 호수를 떠올린다. 하얀색 뛰뛰치마를 입은 발레리나의 쉬르라뽀앵(발끝으로 서는 기술)만 생각한다. 그러나 발레는 시대를 관통해 우리 앞에 선 클래식이다. 어떤 관점에서 읽는가에 따라 꽤나 심각한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나 처럼 패션과 액세서리의 에로티시즘을 중심으로 봐도 재미나고.
키트리와 바질의 친구들, 마을 사람들이 둘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이고 춤을 춘다. 거리의 여인 에스파다의 고혹적인 춤과 뒤를 이어 마을의 남녀들이 스페인의 민속춤인 판당고 춤을 춘다. 판당고는 경쾌하고 즐거운 안달루시아 지역의 플랑맹코다. 이것은 3박자에 맞춰 추는 커플 댄스인데 기타와 캐스터네츠, 팔마(palma)라고 부르는 손을 이용해 부딪쳐 소리를 내는 기구를 함께 들고 춘다. 캐스터네츠는 음악의 리듬에 액센트를 주면서, 봄날의 나른한 기운에 꽃들이 활짝 대궁을 여는 듯,춤을 추는 여인의 관능도 깨어난다.
발레<돈키호테>는 스페인의 매력에 흠껏 빠질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돈키호테가 없었다면 두 남녀의 자유연애는 사랑으로 끝맺지 못했을 것 같다. 그만큼 당시에 자유연애를 부정하는 종교재판과 카톨릭의 폭력 앞에서, 그는 일부러 광인이 되어 시대의 어둠을 이야기한다. 발레 <돈키호테>가 멋진 것은 어둠의 시대를 관통하는 건 역시 사랑이라는 테마임을 재확인 시키기 때문이리라. 아.....올 봄엔 플라멩코나 배워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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