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봉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의 2011년 S/S 시즌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지금에 와서야 포스팅을 하는 건 단순히 내 자신의 게으름 때문은 아니다. 디자이너의 작업을 꼼꼼히 살펴보고 논평을 쓰는 일은 항상 그러하듯, 디자이너가 작품제작에 바친 시간만큼, 이미지를 보고 연상하고 떠올리고 여러가지 생각들을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대학시절 미학수업 첫 시간에 들었던 일종의 저주는 평생의 각인이 되었다 "그림을 비평하고 싶다면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데 든 시간 만큼 그림을 응시하고 생각한 후' 글을 쓰라는 미학 교수님의 설명이었다. 한국의 많은 평론가와 비평가들이 양산하는 글이 자꾸 주례사 비평이 되고 뭔가 허공에 뜬 수사학으로 가득한 화려한 말 잔치에 머무는 까닭은 한 점의 작품을 읽기 위해 '작가가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지금껏 익혀온 철학과 언어를 갖고 뭉개려고 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봤다. 언어는 재현된 작품을 설명하는 매개이지만, 결국 매개과정에서 창작자만큼 의 고통을 겪지 않고 그것을 읽어내기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 이상봉
이번 시즌 이상봉의 작품을 함부로, 그것도 쉽게 접근하기가 수월하지 않았던 건 이런 정신의 습속 때문이다. 이번 S/S 시즌의 영감의 뿌리는 영화적 상상력에 기초한다. 그것도 내가 대학시절 컬트 영화이론을 공부하며 가장 수도 없이 많이 보았던 한 편의 영화 바로 Santa Sangre <성스러운 피>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부티끄에 갔다가 선생님과 저녁을 먹었는데 그때 "올 시즌 작품하면서 성스러운 피란 영화를 한 백번은 본거 같아"라고 하실 때만 해도 무슨 이야기를 하시나 했다. 그런데 나 또한 이번 시즌 작품들을 꼼꼼히 읽으며 <산타 상그레> 영화를 봤다. 그러고 보니 나도 10번은 본거 같은데 여전히 낯설다.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 감독의 연출이 워낙 초현실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터겠지만 툭하면 붉은 선혈이 낭자하고 마술적인 화면이 펼쳐지는 컬트의 고전을 요즘같은 마음 상태로 읽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 이상봉
영화 <산타 상그레>의 감독 알헤한드로 호도로프스키는 1930년 칠레의 볼리비아 국경지역에서 태어난 러시아계의 유태인이다. 25살에 파리로 건너가 판토마임의 대가 에티엔느 두크레에게 마임을 배웠다. 영화 속 주인공 피닉스가 마임이스트로 등장하는 건 바로 이런 영향이 크다. 서커스 단장 오르고와 공중 곡예사의 아들인 피닉스. 오르고는 매일 술과 여자에 탐닉하며 지내고 엄마 콘차는 남자 3명에게 윤간을 당하다가 두 팔을 잃어버린 여인을 숭상하는 <산타 상그레>란 해괴한 사종교집단의 핵심 멤버다. 엄마 콘차는 오르고의 불륜을 확인하고 그의 성기에 황산을 붇지만, 오르고에 의해 두 팔이 잘린다.
이후 피닉스는 정신분열증으로 병원에 감금된다. 이후 병원을 탈출, 엄마의 두 손과 팔이 되어 마임이스트로 이름을 날린다. 엄마의 거세된 욕망은 아들에게 그대로 투사되는데, 결국 피닉스는 엄마가 하라는 모든 명령을 자신의 손으로 이행한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더럽다'고 믿는 엄마 때문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들을 잔혹하게 죽여야 하는 피닉스. 그는 지금껏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을 느꼈던 서커스 단원 알마를 기다리며 엄마의 수족이 되어 산다. 자신이 죽인 여자마다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하는 건 바로 알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감독은 하얀 분칠 이후에 항상 새가 되어 날아가는 여자들의 이미지를 삽입한다. 이번 이상봉의 2011작품은 바로 영화 속에서 화해와 자유의 이미지로 등장한 '새의 이미지'를 그대로 형상화했다.
ⓒ 이상봉
날개짓 하는 새의 척추관절을 형상화해 옷에 덧입힌 작품이 있는가 하면 깃털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붙여 표현한 드레스에 이르기까지, 옷의 모든 면면에서 새의 이미지가 통일적으로 나타난다. 디자이너 이상봉의 시그너처인 구조적인 볼륨감은 이번 작품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깃털의 이미지와 그래픽을 이용한 '새의 상승과 낙하'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올 2011년을 관통하는 패션의 정신은 '극소주의'다. 바로 미니멀리즘이라 불리는 정신의 양상이다. 복잡다단한 사회일수록 단순한 선과 실루엣을 가진 사물에 끌린다. 정신의 휴식을 원하는 인간의 욕망일 것이다.
ⓒ 이상봉
오가닉 실크와 리넨소재를 이용해 만든 전반적인 드레스의 느낌은 가볍고도 명징하다. 이전의 구조적인 주름은 줄어들었지만 깃털 모티브를 살리기 위한 자수의 디테일은 현란하고 눈부시다. 지금껏 이상봉의 작품을 규정해온 특징 중의 하나인 대칭과 비대칭의 조화는 이번 시즌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났다. 화이트와 모래색, 오렌지와 레드가 컬렉션의 색상 팔레트를 채운다. 화려한 색과 그래픽 프린트, 한국적인 여밈선이 결합되어 여성적인 실루엣을 만들어냈다. 봄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런웨이의 풍경도 한몫을 했다.
그 새는 자기 몸을 쳐서 건너간다. 자기를 매질하여 일생일대의 물 위를 날아가는 그 새는
이 바다와 닿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있는, 다만 머언, 또 다른 연안(沿岸)으로 가고 있다.
황지우의 <잠언의 바다위를 나는> 전편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거리에서 그 소리를 시각의 환영으로 변모시키는 여인들의 옷차림이 기대된다. 영화의 끝, 주인공 피닉스는 자기가 사랑하는 알마를 죽이라는 엄마의 명령을 뒤로 하고 칼로 엄마를 죽인다. 지독한 머더 컴플렉스에서 벗어나 현실의 나로 돌아오는 순간. 현실로 돌아오지만, 그 현실은 차라리 마법같은 주술의 겨울 속에서 숨어 지낸 지난 시간보다 더욱 혹독한 것이었다. 현실의 껍질을 깨고 비상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생각해봤다. 새라는 존재는 항상 인간에게 '마음껏 하늘을 날 수 있다는' 환영으로 인해, 항상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존재의 이미지를 투사해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가지 잊고 있는게 있다. 활공상태를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날개짓이 필요하다는 걸. 우리의 자유가 값 없이 주워진 상태가 아니란 걸 말이다. 자기를 매질하여 일생일대의 물 위를 날아가는 새, 그들에게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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