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청바지 클래식

이스라엘 현대무용, '남자의 자격'을 말하다'

패션 큐레이터 2010. 10. 11. 08:30

 

 

■ 왜 남자는 가면을 써야 했을까

 

한 남자가 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은행원 초기의 파릇함은 간데없이, 시도 때도 없이 부지점장에게 헤드락을 당하는 남자. 여자동료를 좋아하면서도 '술 기운'이 아니면 고백조차 못합니다. 답답한 직장생활의 탈출구를 찾던 중. 레슬링 도장에 눈이 갑니다. 가면을 쓴 남자들의 반칙이 난무하는 세계에 끌립니다. 더 좋은 건 관장의 딸이 꽤나 예쁘다는 사실이죠. 은행원 대호의 삶을 레슬링을 통해 180도 변합니다. 가면을 쓴 순간, 일상 속 자신의 정체성은 지워지고 반칙을 일삼으며 악한을 응징하는 타이거 마스크가 됩니다. 98년 송강호 주연의 <반칙왕>의 스토리입니다. 가면은 주인공의 마음 속에 감추인 '열정'을 끌어내 '남자의 새로운 자격'을 부여하는 거울입니다.

 

 

여기 4명의 남자가 있습니다. 무대에는 바흐의 샤콘느가 흐르고, 무대 오른쪽 깊숙히 위용어린 뿔을 한 숫 사슴이 앉아있습니다. 정확하게 보니 관절이 꺽인채로 주저 앉아있군요. 바로 이스라엘 출신의 안무가 요시베르그와 오뎃 그라프의 작품 <네 남자, 엘리스, 바흐 그리고 사슴>의 한 장면입니다. 이 남자들 갑자기 군대춤을 추질 않나 독특합니다. 무슨 일이 생긴걸가요.

 

현대무용에 푹 빠져 13회 서울 세계무용축제(SIDance)의 전 작업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앞으로 5차례의 리뷰를 통해 생소한 '현대무용'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작품의 의미를 읽는 방식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려운 예술장르를 만날 때, '경험한 적이 없어서'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모든 예술은 체험을 통해 '나의 것'이 되는 과정입니다. 의미를 생산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때, 작품은 창작자를 넘어 수용자의 눈을 통해 신세계를 우리 속에 펼쳐보이게 되죠.

 

 

<네 남자, 엘리스, 바흐 그리고 사슴>은 '궁극의 남자'는 무엇일까 라는 화두를 몸으로 표현합니다. 최근 '남자의 자격'이 인기인데요. 진정한 남자가 되기 위해 벗어야 할 옷은 무엇일까요? 칙칙한 남자 무용수 4명이 출연하는 작품. 지금껏, 무용하면 그저 턱선 갸름한 여자 무용수만 생각한 분 들은 더더욱 특이할텐데요. 안무가 요시베르그의 말을 들어보면 "남자 무용수들로만 구성된 작품을 통해 춤과 신체성을 탐구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남성들은 아랍권과의 지속적인 대립 속에서 '거친 남성성'즉 마초이즘을 사회적 코드로 각인시키며 살아갑니다.

 

요시베르그의 작업은 '남성성'을 규정하는 다양한 정의와 요소를 춤의 영역 속으로 끌어당겨 '남자의 자격'에 대해 질문합니다. 어쩜 그리도 남자들의 세계는 엇비스한 것인지, 그들이 노래하는 '먼 나라에선 그저 빵빵한 여자들이 길거리를 활보하고 맥주와 축구게임을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곳일 뿐입니다. 작품 속 엘리스는 남성의 성적 본능을 자극하는 '환상'속의 타자일 뿐이죠. 극이 시작되면 가면을 쓴 4명의 남자들이 등장해 '남자들의 의식'을 통한 굳건한 우애를 선보입니다. 엘리스란 가상의 여자가 나타나며 그 관계엔 균열이 생기죠.

 

마스크란 남자의 본능과 열망을 넘어 존재하는 사회적 코드입니다. 극이 깊어지면 남자들은 이 가면을 쓰고 벗고를 반복합니다. 사회의 망 속에 놓인 '남자'들이 반복을 통해 걸쳐 입어야 하는 '만들어진 남자의 자격' 이것이 바로 마스크입니다. 사이키델릭 조명이 오랜동안 무대를 쏘고, 배우들의 행동은 마치 관절 하나하나가 연결되는 것처럼 분절됩니다. 눈부신 조명이 끝나면 남자들은 하의가 벗겨진 채, 숫 사슴을 죽인 남자가 다른 남자들의 가면을 벗깁니다. 궁극적인 '남성성'에 대해 물어보지만 혼돈스럽습니다. 이 작품은 음울한 남성들의 판타지를 통해, '남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묻습니다. 영화 <반칙왕>에서 대호는 가면이 찟겨지면서 자기 안의 '비루함'과 싸워냈듯 작품 속 남자들도 '가면을 벗고 난'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합니다.

 

 

두번째 작품<어느 더운 나라의 정비공 트리오>가 이어집니다. 원래는 이 작품이 먼저 시연되었습니다.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마치 문어의 빨판처럼 한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는 서로에게 엉켜있습니다. 안무가의 설명을 들으니(공연 후 안무가와의 대화가 있었습니다) "전자게임을 연구하면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각자의 역할을 통해 서로의 캐릭터가 정의되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하네요.

 

 

이번 현대무용작품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마치 미술의 '개념미술'을 경험하는 느낌입니다. 성(性)과 젠더의 문제, 인종, 정체성과 같은 주제를 화두로 언어 없이 몸을 통해 표현하는 과정은 '동작 하나하나를 포갬'으로써 '단어의 집합체'를 만드는 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영국의 18세기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시를 통해 '예술의 근본적 기준'을 논합니다. "우리가 눈을 통하지 않고, 단지 눈만으로 바라볼 때 그것에 유혹되나니"라고요. 자세히 읽어보면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될 겁니다. 물리적인 눈을 갖고 있다고 해서 예술의 의미가 파악되는 게 아니라는 거겠죠. 눈을 통한다는 것은 인식작용과 더불어 의미를 만드는 것들과의 '공감과 화해'가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What can you say with body? 몸을 갖고 과연 무엇을 말 할 것인가? 무용의 힘에 대해 이 보다 정확한 정의가 있을까요?

 

 

무용은 인간의 비루한 몸, 그 자체로 비논리인 물질을 통해 사회 속  논리의 세계를 논평합니다. 이때 몸은 물리적 실체를 넘어 '언어'로서의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지요. 무용을 이해하려면 내 몸에 내재된 욕망이 사회의 다양한 상처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몸'을 통해  읽어야 합니다. 철학자의 이름을 남발해야만 예술을 이해한 듯 한 '착각'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예술 이론 전공자 중엔, 꼭 자기가 읽은 책 자랑 못해 안달하는 친구들이 있죠.  참 한심합니다. 몸으로 쓰는 언어를, 몸으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진부하게 굳어버린, 이론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몸에 조응하는 우리 안의 정서입니다. 우리는 무용수들의 몸 속에 각인된 언어를 몸으로 읽고 '감응하고 공감'하면 될 뿐입니다. 이게 어려울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용을 실제로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느껴보세요. 내 눈 앞에 현존하는 무용가의 땀방울과 육체의 흔적이 곧 내 영혼을 파고들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