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큐레이터의 서재

뚱뚱한 아저씨가 만든 옷-지안프랑코 페레의 패션 레슨

패션 큐레이터 2010. 9. 22. 22:08

 

 

뚱뚱한 아저씨,

       -옷을 디자인하다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였지 싶다. 논노니 보그니 하는 해외 자료를 구매하기 어렵던 시절, 꿈에 부푼 중학생에겐 우먼스 웨어 데일리니, 더블유니 하는 잡지들은 먼 세계의 몽환일 뿐이었다. 이때 한글로 쓰여진 패션잡지가 나왔다. 월간 <멋>이란 잡지였다. 무슨 성경책 읽듯, 밤새 묵상하고 줄긋고, 용어들을 외우곤 했다.

 

플리츠 주름이 뭔지, 텍스타일이 뭔지, 개더, 인터라이닝 등 별별 해괴한 단어들이 음가 그대로 소개되던 시절이다. 그래도 좋았다. 이상봉 선생님의 팝아트 풍 원피스 수영복 프린트가 아른거리고, 디자이너 설윤형의 보자기를 응용한 한국패션에 매혹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오리지널 리의 전통한옥 문살과 고리모양을 응용한 삼베 드레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때 해외 디자이너 이름도 꽤 많이 외웠다. 모스키노와 디오르를 이때 외었다. 뚱뚱한 몸매에 안경을 쓴 꽤나 후덕한 인상의 아저씨가 멋 잡지에 자주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지안프란코 페레, 이탈리아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로, 현대 디자이너들에겐 패션의 건축가로 불린다. 패션의 논리와 미학을 새롭게 정립했던 남자.

 

그의 이력은 패션과 건축의 유비관계를 사유하는데 도움이 된다. 밀라노 공대에서 건축사 학위를 받았던 그가 1970년 패션 액세서리를 디자인 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얼까?  1974년 자신의 이름을 건 컬렉션을 발표하며 명성을 얻는다. 페레하면 1989년 크리스티앙 디오르 하우스의 스타일 디렉터로서 기억하는 이가 더 많다. 디자이너 자신은 편안하고 릴렉스된 제품들을 선보였지만, 세련된 백색 셔츠를 자신의 시그너처 아이템으로 성공시켜 디오르에 돈을 좀 벌어줬다. 그는 트랜드라 불리는 것들을 믿지 않았다. 패션의 본질은 인간의 형태에 입혀지는 옷의 조형성에 있다고 보았던 그였다.

 

"패션은 논리이자 방법론이며 하나의 시스템이다. 패션은 직업이다. 그것은 여러 직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디자이너와 재단사, 장인들과 기술자들, 이들 모두 열정과 헌신, 지속적인 자극을 탐색할 수 있는 호기심으로 똘똘 뭉쳐있다. 타인들이 옷을 착용하는 방식과 그 속에 내재된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교양까지 요구한다. 충고를 듣고 싶나? 지식습득과 실험정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표현하는 법, 무엇보다 패션은 하나의 꿈임을 잊지 않는 일이다"

-지안 프랑코 페레-

 

이번 패션 큐레이터의 서재에 입고된 34권의 책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이 뚱뚱하지만 탁월한 감성의 디자이너, 페레가 쓴 패션 레슨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널리스트 마리아 루이자 프리사가 1994년부터 2007년까지 2007년 6월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대학과 기관에서 행했던 일련의 강의들을 모아 선집한 것이다. 여기에 지안 프랑코 페레 재단의 상임 디렉터인 리타 애라기가 강의의 주요 텍스트에 복식사 연구 방법론을 원용하여 재가공했다. 페레재단은 이탈리아 패션의 역사를 연구하는 일종의 지적 아카이브 역할을 한다. 런던에서 동경, 밀라노에서 이스탄불과 상하이에 이르기까지, 그의 강의는 항상 인기를 끌었다. 그의 상상력과 건축에 기초한 공학적 정확성, 무엇보다 집을 짓듯, 인체위에 짓는 옷이란 3의 건축물에 대한 그의 생각들은 하나같이 명징했다.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지의 수지 멘키스가 조직한 '럭셔리 산업 컨퍼런스'에서 그가 했던 강의도 잘 녹아있다. 이 책 꽤 쓸만하다.

 

 

 

시대가 변했다고 말한다. 패션은 시대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산업이자 문화적 기재이지만, 당대를 살았던 거장의 목소리로 듣는 패션의 교훈은 꽤나 묵직하다. 그렇다. 부박하고 가볍게, 쿨이란 미명하게 '견고한 세련미와 철저한 실험정식'을 비웃는 시대일수록, 장인의 목소리는 더욱 힘이 세다. 뚱뚱한 아저씨가 만든 옷은 건축물을 닮아 항상 조형성과 견고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난 옷에 배어나는 그의 정신을 사랑했다. 페레 아저씨 천국에서 잘 지내시겠죠?